양산서원 沿革



양산서원 沿革

소​재지 : 경북 군위군 부계면 남산리 296

창건연대 : 1786년 병오 (정조10年)

양산서원은 1711년(숙종 37) 고려조를 위해 순절한 경재 홍로(洪魯)(부림홍씨 9세)를 주향하기 위해 세운 율리사(栗里社)가 그 전신으로 1786年에 缶林洪氏 세거지에 설립된 지방 교육기관이였으며 문하사인 경재 洪魯선생과 조선조 좌참찬 겸 양관 대제학을 역임한 시호 문광공 호 허백정 洪貴達선생 이조좌랑과 대제학을 역임한 우암 洪彦忠선생의 절조와 학덕을 기리기위해 세분의 영위를 봉안한 묘우를 비록하여 유생 강학을 위한 흥교당(興敎堂)을 중심으로 입나재(立懦齋), 구인재(求仁齋), 읍청루(挹淸樓), 반무당(半畝塘) 등의 부속건물로 그건립 규모가 방대하였으나 1868년(高宗5年) 조정의 서원 철폐령으로 묘우와 부속건물이 훼철되고 강당만 남게 되었다. 그후 1948년(戊子) 척서정 이건하고 구척서정은 양산서당으로 改板하였다. 1969년(기유)에는 서당 후정에 장판각을 지어 경재선생실기 木板과 목재 洪汝河선생이 수찬한 휘찬려사(彙纂麗史) 木板(경상북도 유형문화재251호)을 보관하여 온 유서깊은 곳이다. 이목판은 200년 가까이 보관해 오다 2011년 12월 안동의 한국국학진흥원으로 이관하여 보관중이다.

1649년(己丑, 인조 26)

용재서원湧才書院 창건, 경재敬齋 홍로洪魯 선생 배향配享

사림의 공의公議에 따라 경재 홍로(1366~1392, 부림 홍씨 9세) 선생의 유허지인 용재산 기슭(湧才之麓, 陽山 부근으로 추정)에 서원을 세우고 경재선생을 배향하다.

1711년(辛卯, 숙종 37)

율리사栗里祠() 창건, 경재 홍로 선생 배향

용재서원湧才書院의 옛 땅에 율리사를 창건하고 경재 홍로 선생을 배향하다. 묘우廟宇는 율리사栗里祠, 당堂은 낙육재樂育齋, 원장院長은 산장山長이라 칭한 것을 보면 서원의 규모를 갖춘 것으로 짐작된다. 1742년(영조 17) 국령에 따라 훼철되었다.

1783년(癸卯, 정조 7)

세덕사世德祠 창건, 경재 홍로 선생과 더불어 허백정虛白亭 홍귀달洪貴達, 우암寓菴 홍언충洪彦忠 3선생 합향合享

1786년(丙午, 정조 10)

세덕사世德祠를 양산서원陽山書院으로 승호陞號

향의鄕議와 도의道議에 따라 사祠를 원院으로 승호하고 양산서원이라 현판懸板하다. 양산에서의 경재선생 행적이 중국 고대 백이伯夷⋅숙제叔齊의 수양산首陽山에서의 행적과 닮은 데다 지명마저 우연히 같아 선생의 도의와 충절을 높이기 위해 양산서원이라 이름 붙였다.

1820년(庚辰, 순조 20)

양산서원 중건重建, 증축增築

서원의 모습을 완전히 갖추다. 당堂은 흥교興敎, 좌실은 입나立懦, 우실은 구인求仁, 누樓는 읍청挹淸이라 현판 하였으며, 읍청루 옆으로 물을 파서 반무당半畝塘이라 하였다. 사묘祠廟와 동서재東西齋의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경재선생실기敬齋先生實紀와 (목재선생가숙)휘찬려사(木齋先生家塾)彙纂麗史목판 보관하다. 1826년 경재 홍로 선생의 경재선생실기를 초간初刊하고 목판을 양산서원에 보관하다. 경재선생실기는 정언正言 홍종섭洪宗涉이 총책임을 맡아 간행하였으며, 각판 73판과 보판 5판, 총합 78판, 단권으로 간행하였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목재선생가숙)휘찬려사의 목판도 양산서원에 보관하다.

1854년(甲寅, 철종 5)

양산서원 사액賜額 청원請願

8월 양산서원의 사액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장계가 중간에 머무른채 답이 내려오지 않다.

1855년(乙卯, 철종 6)

양산서원 사액과 관련 예조禮曹에 글을 올림

전년에 올린 「청액상언請額上言」이 본관本官을 통과하여 이해 10월 예조에 글을 올리다. 예조에서 사액과 미사액을 구분치 말고 양산서원도 사액서원의 정례定例에 따를 것을 답하다.

1868년(戊辰, 고종 5) 양산서원 훼철

7월에 이어 9월에 거듭 본읍本邑 다섯 서원(陽山, 龜陰, 文陽, 道岡, 羅溪)에 대한 훼철령이 내려와 10월에 부득이 3선생의 위패를 강당에 옮겨 모시고 묘우를 훼철 하였으며, 11월에 다시 위패를 뒷산 기슭에 묻고 강당과 동서재도 허물다. 양산서원 승호陞號 후 82년이 지난 때였다.

1872년(壬申, 고종 9) 양산서원 묘우 복설 중단

종손 홍영수洪英修를 중심으로 양산서원 묘우 복설을 시도하다가 홍영수가 압송되어 곤양昆陽으로 1년 간 유배를 가면서 중단되다.

1897년(丁酉, 광무 원년) 척서정陟西亭 창건

양산서원 유허에 3선생을 기리기 위해 척서정을 창건하다. ‘척서陟西’는 ‘서산西山에 오르다’라는 뜻으로, 경재선생의 행적이 일찍이 백이⋅숙제가 서산(首陽山)에 올라 고사리를 뜯어 먹으며 숨어 살다 죽었다는 고사와 닮아 붙인 이름이다. ‘陟西亭’ 판액은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가 썼다.

1920년(庚申) 척서정 내 묘우 중건

척서정 내에 묘우를 중건하였지만, 제향을 올리지는 못하다.

1948년(戊子) 척서정 이건移建, 양산서당陽山書堂 건립

척서정 내 묘우를 양산폭포 옆으로 이건하여 ‘陟西亭’ 판액을 달아 경재선생의 ‘갱장지소羹墻之所’로 삼고, 구 척서정은 양산서당으로 개판改板하여 경재선생의 ‘추모지소追慕之所’로 삼다. 이후 척서정과 양산서당을 여러 차례 보수하다.

1969년(己酉) 양산서원 내 장판각藏板閣 건립

경재선생실기와 휘찬려사 목판 보관을 위해 석조石造 장판각을 건립하다.

1990년(戊午) 휘찬려사 목판 문화재 지정

8월 7일 양산서당 내 휘찬려사 목판이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51호로 지정되다.

2011년(辛卯) 경재선생실기와 휘찬려사목판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 보관

12월 200년 가까이 양산서원(당)에 보관해 오던 경재선생실기(총 41판)와 (목재선생가숙)휘찬려사(총 830판) 목판을 학술발전과 영구보전을 위해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 보관하다.

2015년(乙未) 양산서원 원상태로 복원

양산서원 복원과 3선생 위패 환안還安과 목재木齋 홍여하洪汝河, 수헌睡軒 홍택하洪宅夏 선생 추가 배향.

한국국학진흥원 기탁 목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결정.

이완재李完栽 영남대 명예교수 초대 원장 취임.

정부의 지원금을 받아 3년 가량의 공사 끝에 양산서원을 복원하여 4월 준공식을 가지고, 10월 향내 유림과 인사들의 뜻에 따라 이전 3선생의 위패를 환안하고 목재 홍여하, 수헌 홍택하 양 선생을 추가 배향하다. 대원군 때 훼철된 후 147년이 지나 완전 복원되었으며, 공사의 총책임은 홍대일이 맡았다. 묘우는 겹 3간으로 묘호가 숭덕사崇德祠이고, 당은 10간, 누는 겹 3간으로 이전의 이름을 그대로 가져와 흥교당興敎堂, 읍청루挹淸樓라 현판하였으며, 동서재는 각 3간으로 이전 정당 협실夾室의 이름을 가져와 입나재立懦齋와 구인재求仁齋라 현판하였다. 「양산서원복원기문陽山書院復元記文」은 국민대 명예교수인 전 한국국학진흥원 초대원장 조동걸趙東杰 박사가, 「양산서원묘우복원상량문陽山書院廟宇復元上樑文」과 「읍청루복원기문挹淸樓復元記文」은 영남대 명예교수 채산採山 홍우흠洪瑀欽 박사가 지었으며, 양산서원 복원을 맞아 계명대 교수 이훤怡萱 홍원식洪元植 박사가 경재선생의 「개찬행장改撰行狀」과 「연보年譜」및 수헌 홍택하 선생의 「연보」를 지었다. ‘陽山書院’과 ‘崇德祠’, ‘日省門’등의 판액 글씨는 홍우흠 박사가 썼으며 ‘挹淸樓’ 판액은 전해 오던 구 현판의 글씨를 모사하여 걸었다. 10월 경재선생실기와 (목재선생가숙)휘찬려사 목판을 포함한 한국국학진흥원이 기탁 보관해 오던 목판 6만여 판이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에 등재 결정되다. 10월 양산서원 운영위원회에서 이완재李完栽 영남대 명예교수를 초대 원장으로 추대하여 취임하다.

哲學博士 洪元植 敎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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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서원 復元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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