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인물
경재선생 홍노(洪魯)

휘 노(魯),  호 경재(敬齋),  자 득지(得之)

缶林洪氏 9世祖

1366년 1월13일生(고려공민왕)

1392년 7월17일卒(고려공양왕)

경재공께서는 부림홍씨 제1세조이신 직장공 휘 좌(佐)의 9세손이다. 1393年 피자휴선생이 쓰신 경재선생실기행장에 의하면 公께서는 어릴때부터 모습이 장중단아하고 7세에 이미 효경의 참뜻을 이해하고 그 효경의 가르침을 어기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장성한 뒤에는 성리학에 마음을 기우려 고금의 가례와 성리학의 연원록을 정독하였으나 과거에 응시하여 속세에 득세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으셨다. 그러나 아버님 진사공의 권유에 따라 드디어 22세에 생원시 합격하고 25세에 별시에 급제하셨다. 이와같이 公께서는 일찍부터 학문이 뛰어나고 덕망이 높아 많은 사람들의 모범이 된지라 임금님께서도 이를 진중히 여겨 차례를 거치지 않고 좌습유에 제수하셨고 다시 한림학사를 거처 문하사인(門下舍人)으로 승진되셨다. 그러나 문하사인의 직위로 나간지 2년이 지날 무렵 고려의 국운은 극도로 쇠퇴하여 망국의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아무도 기울어진 나라의 기둥을 바로 잡을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公께서는 크게 낙담하여 모든 것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낙향 할 것을 결심하셨다. 마침 신병이 나심에 이를 핑계로 사퇴를 하고 고향 율리로 돌아오셔서 선친이신 진사공을 모심에 성심으로 봉양하셨으며 앞으로 관직에 나아감을 단념하셨다. 이때 고향 집의 당호도 경재(敬齋)라 하셨다.

그해(1392년) 가을 7월4일에 지병이 더욱 깊어짐에 7월17일 사시에 이르러는 의관을 정제하고 침전에 계시다가 조용히 세상을 떠나셨다. 당시의 나이가 27세의 젊은 나이임에 꽃을 다 피우지 못하고 떠나심이 심히 안타까울 따름이다. 군위군 산성면 백학리(시현)良坐에 장례를 드렸다. 公의 배위는 흥양위씨 상공 휘 臣哲의 따님이시며 슬하에 휘 재명 한분을 두심으로서 오늘날 부림홍씨 가문의 종손계보를 이을수 있었으며 그 외에도 많은 지손들이 번창하여 고향을 지키고 있다.

다음은 公의 학문연원과 사상에 대하여 살펴보자. 公은 程. 朱의 性理學이 수용되어 세력이 크게 떨치던 시대에 일생을 보내신 분이셨다. 公은 당시 나라에 성리학의 기초를 세운 포은 정몽주의 문인이며 영남 사림의 개창자인 야은 길재선생과도 교분이 두터웠던터라 일찍부터 성리학으로 학습하실 기회를 얻게 되었다. 하지만 경재공은 국가가 위급존망의 지경에 놓였던 시기에 사셨던 분이며 27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신분이기 때문에 손수 남겨놓으신 문헌적인 자료가 극히 소수이다. 그러나 그 소수의 자료 속에서도 “사람의 본래 성품은 하늘이 부여한 밝은 도리를 가지고 태어난 까닭에 사람에게는 착한 性品이 항상 存在하고 있다고 믿는다”라는 성리학의 기본정신을 삶의 최고 목표로 삼고 살아오셨던 분이다.

스승이신 포은 정몽주선생의 丹心歌

“이몸이 죽고죽어 일백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향한 일편단심 가실줄이 있으랴“는

당시 성리학자들의 이상이며 목표였다. 경재공은 바로 이 [性] [理]의 길을 체득하셨음과 아울러 그 진리의 길을 어기지 않고 나아가셨던 분이였다.

황천풍부여(皇天豊賦與)  물칙비오인(物則備吾人)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 하실 때 우리에게 물칙을 갖추어 주셨도다.

 

자효선유색(子孝先愉色)  신충귀치신(臣忠貴致身)

어버이에게 효도함엔 밝은 표정 먼저하고 나라에 충성함엔 몸 바침을 귀히 하라.

 

교우사시절(交友思偲切)  돈종무육친(惇宗務陸親)

친구를 사귈땐 겸손하고 친절히 하며 일가를 대할때는 화목함에 힘쓰라.

 

入室安吾分(입실안오분)  출문계대빈(出門戒大貧)

집에 들어와서는 분수를 지키고 밖에 나가서는 손님 대하듯 조심하라.

 

위의 글은 경재공 가훈시 집에서 발취한 내용이며 이것이 바로 경재선생의 성리학적인 사상이였다.

평생충의온제심(平生忠義蘊諸心)  치택군민포부심(致澤君民抱負深)

[평생을 충성 의리에 모든 마음 다 기울여 임금님과 백성을 위해 포부가 깊었는데.

 

만사간금원숙계(萬事干今遠宿計)  불여귀거와운림(不如歸去臥雲林)

만사가 이제와서 뜻과는 어긋나니 차라리 돌아가서 운림(雲林)에 숨어살리라

 

회포를 적은 글 사회(寫懷)에서 볼수 있는바와 같이 충성과 의리로 임금님을 모시고 백성을 다스리는 길을 걷는 것이 경재선생의 포부요 이상이였다. 그러나 당시 시대의 환경은 그러한 이상과 포부를 실현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부득이 고향 전원으로 돌아가 가슴에 품었던 높은 뜻을 고이 간직하려 했을 때 나라(高麗)가 망하는 절통한 비보를 접하고는 더 이상 이세상 사람으로 살아가야 할 길을 잃고 만 것이다. 조국 고려의 패망과 더불어 죽음을 함께 하신 것이다.

경재선생 약사 (敬齋先生 略史)

1366년(丙午, 공민왕16) 1세

정월 13일 인시寅時에 경상북도 군위군 부계면 남산리 갖골 (한밤고을)에서 태어나다.

선생의 본관은 부림缶林이고, 휘는 노魯 자는 득지得之, 호는 경재敬齋이다. 시조는 고려조에서 재상을 지낸 난鸞이고 기시조起始祖는 좌佐로, 선생은 부림 홍씨 9세이다. 조부는 감무監務를 지낸 연漣이고, 조모는 해주최씨海州崔氏 문헌공文憲公 최충崔沖의 후손이며, 부는 진사進士 민구敏求이다. 부 민구의 자는 호고好古이며 호는 죽헌竹軒으로 어머니 최씨에 대한 효성으로 유명하였다.

1387(丁卯, 우왕13) 22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다.

이해 8월 15일 포은 정몽주鄭夢周가 문생門生 13인과 팔공산八公山 동화사桐華寺에서 모임을 갖고 각자 친필 연구시첩聯句詩帖인 「백원첩白猿帖」을 남겼는데, 선생도 당시 모임에 참가하여 친필 연구시를 남기다.

1390(庚午, 공양왕2) 25

별시別試 문과文科에 합격하다.

7월에 귀양 땅에서 이색李穡과 조민수曺敏修 등을 불러 오도록 임금께 밀계密計를 올리다.

1391(辛未, 공양왕3) 26

포은공이 선생을 한림원翰林院에 추천하였으며, 임금의 지극한 사랑으로 단계를 밟지 않고 정4품직인 문하사인門下舍人에 오르다.

1392(壬申, 공양왕3) 27

1월 이성계李成桂 일파의 정치적 세력이 더욱 강화되고 신왕조를 세우려는 야욕이 노골화되자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병을 핑계로 귀향하다. 선생이 떠날 때 스승인 포은공이 이 소식을 듣고 “득지가 참으로 뜻을 얻었도다!(得之得之)”라고 말하다. 선생은 고향으로 돌아온 뒤 포은이나 야은冶隱 길재吉再와의 관계를 일체 숨긴 채 도연명陶淵明의 행적을 좇았지만 포은과 은밀히 연락하다. 4월 포은공이 선죽교善竹橋에서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듣다.

7월 17일 곡기穀氣를 끊은 지 13일 만에 자진순절自盡殉節하다. 향년은 27세이며, 선생이 순절하기 전날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섰다. 선생은 스무 일곱 젊은 나이에 순절하였으며 유언과도 다를 바 없는 <가훈시家訓詩> 를 남기다.

9월 부계면缶溪面 동쪽 시현市峴 간좌지원艮坐之原에 장사지내다.

는 흥양興陽 위씨韋氏 상공相公 신철臣哲의 따님이며, 아들 재명在明을 두었다.

1393(조선 태조2, 몰후 1)

동방급제同榜及第한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 피자휴皮子休행장行狀을 짓다.

1400(태종원년, 몰후 8)

동방급제한 예조참의禮曹參議 허조許稠가 선생의 시집서詩集序를 짓다.

1649(인조26, 몰후 257)

용재산湧才山 기슭(陽山 근처로 추정)에 용재서원湧才書院을 창건하고 선생을 제향하다.

1711(숙종37, 몰후 319)

용재서원湧才書院 옛 터에 율리사栗里祠()를 창건하고 선생을 제향하다.

1771(영조46, 몰후 379)

숭정대부崇政大夫 호조판서戶曹判書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이 새로이 묘갈명墓碣銘을 짓고 묘비墓碑를 세우다.

1783(정조7, 몰후 391)

세덕사世德祠를 창건하고 선생과 함께 문광공文匡公 허백정虛白亭 홍귀달洪貴達, 우암寓菴 홍언충洪彦忠 3선생을 합향合享하다.

1786(정조10, 몰후 394)

1228일 세덕사가 양산서원陽山書院으로 승호陞號되다.

1826(순조26, 몰후 434)

경재선생실기敬齋先生實紀를 초간初刊하다.

1868(고종5, 몰후 476)

대원군大院君의 서원훼철령書院毁撤令에 따라 양산서원이 훼철되다.

1897(丁酉, 광무원년, 몰후 505)

양산서원 유허에 척서정陟西亭을 창건하다.

1916(몰후 524)

친필 서신書信인 「상포은선생서上圃隱先生書」가 한성漢城 홍병훈洪炳勳의 집에서 포은의「답서答書」와 함께 발견되다.

1920년 경

선생의 친필이 포함된 백원첩白猿帖이 발견되다.

1927(몰후 535)

수동壽洞에 수산서원壽山書院을 창건하고 포은공圃隱公과 선생을 합향合享하다.

1948(몰후 556)

척서정을 양산폭포 옆으로 이건하고, 그 자리에 양산서당陽山書堂을 세우다.

1964(몰후 572)

선생의 유허에 유허비遺墟碑를 세우다.

2011(몰후 619)

12월 양산서원에 보관해오던 경재선생실기와 (목재선생가숙)휘찬려사 목판을 학술발전과 영구보전을 위해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 이관하다.

2015(몰후 623)

양산서원을 복원하고 선생의 위패를 문광공 허백정 홍귀달, 우암 홍언충 선생의 위패와 함께 환안還安하고, 목재 홍여하洪汝河 선생과 수헌 홍택하洪宅夏 선생의 위패를 추가 배향하다.

201510

철학박사 계명대 홍원식 교수가 「연보」를 지은 뒤 요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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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광公 홍귀달(洪貴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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