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인물
문광公 홍귀달(洪貴達)

휘 귀달(貴達),  시호 문광(文匡),  호(허백정虛白亭. 함허정涵虛亭),  자(겸선兼善)

缶林洪氏 10世祖

1438年 6月 28日生(세종20년 무오)

1504年 6月 22日卒(연산11년 갑자)

 

허백정선생은 1438년(세종대왕20년) 경상북도 함창군 양적리에서 태어났다.(부:효손(孝孫). 모:안강노씨(安康廬氏)). 7세때부터 함창현 남쪽 율리에 있는 서당에 나가 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집이 가난해 밤이면 등불을 켜지 못해 책을 읽을수가 없었다. 생각 끝에 서당에 갈때마다 소나무 관솔을 베어와 밤새도록 불을 밝히며 책을 읽었다. 9세때 부터는 더욱 학문에 열중하였고 집에는 읽을 책이 없었기 때문에 항상 남에게 빌려서 읽었으며 빌린 책은 반드시 다 외운후에 돌려주었다고 한다. 15세에 이르자 학문이 크게 진보하고 언행에 법도가 있으므로 주위 사람들은 이미 大儒로 지목하기까지 했다. 

 

당시 때는 단종이 세조에게 쫓겨나면서 세조가 집권하던 시대였다. 세조 22년 20세에 선생은 김선치의 현손녀와 결혼하였으며 22세 되던 해에 비로서 진사시에 합격하고 24세에 드디어 세조가 직접 주관한 별시에 응시하여 3등으로 합격하였다. 25세 되던해에는 승문박사에 선발되어 점필재 김종직 등과 사귐에 당시 사람들은 사군자라 부르기도 했다. 이듬해 예문관 봉교에 추천되자 당시 실력자 徐居正은 [우리나라에서 문장을 맡을 사람이 그대 아니고 누구이겠는가]라고 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보아 허백정선생은 당대 명사들 가운데서도 가장 출중한 인물이였음을 알수 있다. 30세 되던 5월에 함길도 병마평사에 선임되어 역적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데 뛰어난 공훈을 세움에 공조정랑에 특진되었다. 34세에 사헌부장령에 제수되어 중요한 국가 정책문건 작성을 수행함에 단한번의 착오가 없는지라 당대 최대의 권위자인 서거정은 다시한번 선생의 학문과 인품을 높이 평가했다. 성종대왕은 이러한 재신들의 여론에 의해 선생을 성균관전한 및 홍문관전한을 제수하여 경연에서 강론을 담당하도록 했다. 그후 侍御史를 거쳐 직제학을 지냈으며 41세에 이르러서는 좌부승지에 승진 임금님의 명령에 의해 [매화시]와 [백아탄금도]란 詩를 지어 올리기도 했다.

 

선생은 가선대부 형조참판 직에 있을 때에 남산 및 청학동에 초가집을 짓고 그 이름을 虛白亭이라 하여 퇴근후엔 이 허백정에서 속세를 초월한 평민처럼 즐거움을 누렸다. 44세에 명나라 황태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모친의 부음을 받고 빈소로 달려 갔다. 45세 되던해 정월 함창현 동전촌 북모산에 모친 장례를 다음 묘옆에 여막을 치고 3년 동안 시묘를 하였다. 52세 되던 해 대사헌 시절 다시 사직소를 올려 고향에서 부친을 봉양 할수 있도록 청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고 부친이 세상을 떠나시자 고향으로 내려와서 모친 노씨 묘 동쪽 지초산에 부친의 장례를 치렀다. 그후 모친상 때와 마찬가지로 부친 묘 옆에 여막을 짓고 다시 3년동안 시묘생활를 하였다. 시묘생활을 마친후 애경당(愛敬堂)을 지어 부모님을 추모하는 뜻을 간직하기도 했다. 성종 23년 선생이 55세 되던해 성종대왕은 특별히 선생을 자헌대부 지중추에 승진시키고 홍문관 대제학과 예문관 대제학을 겸임하도록 했다. 이는 허백정선생이 당대 최고의 명사였음을 증명하는 동시에 부림홍문을 조선조 명문가 반열에 올려놓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할수 있다.

 

선생이 59세인 연산군 2년에는 疎를 올려 대간(臺諫)들에게 언로를 개방하라고 요청했다.

<언로는 하루도 막혀서는 안됩니다. 신은 생각하옵건데 임금님의 존귀함은 하늘과 같으며 그위엄은 우뢰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신하 가운데 임금님과 더불어 옳고 그름을 따질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대간입니다. 임금님은 아무에게도 굽힐 필요가 없지만 오직 대간에게는 자신의 의견을 굽혀 그말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굽힘은 굽힘이 아닙니다. 직간함을 실행하고 말을 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그정치적인 도리는 어떤 임금님 보다도 뛰어날 것입니다. 이른바 잠시 굴복하여 영원히 펴는 일이 될것입니다. 때문에 임금님의 덕은 대간의 직간함을 받아 들이는것 보다 더큰것이 없을줄 아옵니다. 하물며 지금은 임금님께서 즉위하신 초기라 온백성은 태평한 치적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간과 군신들이 조정에서 10여일이나 직간을 해도 임금님께서는 들어주시지 않으시니 아마도 언로는 여기서부터 막히게 될것입니다. 언로가 막히면 다음부터는 비록 큰일이 일어나도 모두가 입을 다물고 혀를 동여 메어 감히 말을 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이는 그때 올린 소의 내용이다.

허백정선생과 같이 조정의 사정을 아는분이 연산군의 사람됨을 이해하지 못할리 없었다. 직언을 하면 어떤 화가 돌아 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선생께서는 직언극간을 서슴지 아니했다. 선생은 이즈음 양양객사증수지, 형조참판 김승경 묘지명, 선산객사증수기, 좌찬성이철견공신도비명 등 많은 문장을 쓰며 어두워 오는 시대 형세를 맞이하고 있었다.

 

허백정선생이 61세 되던 연산군 4년 여름에 드디어 그 유명한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무오사화는 이극돈, 유자광 등이 점필재, 김종직 등 사림파를 제거하기위한 필화사건 이였다. 이극돈이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이 쓴 史草와 그내용에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세조가 단종을 죽인을 사실을 비판한 글)이란 글을 보고 이를 연산군에게 알리고 평소 사림파를 미워하던 연산군은 대노하여 일거에 관련자들을 처단한 사건이였다. 이때 허백정선생은 대제학의 자리에서 김일손이 쓴 사초를 보고도 알리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좌천되었다. 그해 가을엔 이종준을 구원하는 疎를 올렸고 62세때는 다시 죽음을 무릅쓰고 대간의 옳은 말을 받아드리도록 연산군에게 간곡한 소를 올렸다. 선생은 이미 연산군을 임금으로 여기지 않았고 명목상 임금자리에 앉아있는 연산군을 그냥보고만 있을수 없었다. 끝까지 신하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 목슴을 걸어놓고 위와같은 직언극간을 계속했다. 선생께서는 2월에 성종실록을 완성하고 63세때 봄에는 역대명감을 완성하였다. 그리고 수시로 연산군에게 직언극간을 했다.

[성인의 학문을 배우는데 힘써야 한다]

[끝마무리를 신중하게 해야 한다]

[언로를 넓혀야 한다]

[아무일이나 좋아해선 않된다]

[상과 벌을 명확히 해야 한다]

[수령을 옳게 발탁해야 한다]

[군인의 수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군인들을 괴롭혀서는 않된다]

[사신을 잘 단속해야 한다]

[함부로 토목공사를 벌려서는 않된다]

[수렵행위를 금해야 한다]

이상과 같이 11개 조목의 절실한 상소도 올렸다.

 

그러나 이때부터 허백정선생은 비운을 맞게 되었다. 여러번의 상소문을 올리자 지극히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던 연산군은 드디어 간신 모리배들의 이간질을 받아들여 대제학 등 모든 관직을 삭탈파직 했다. 66세 되던 해에는 다시 경기도관찰사에 제수 되었으나 결국 직언극간으로 연산군의 미움이 있던차에 1504년에는 언국의 딸, 바로 그의 손녀를 궁중에 들이라는 명을 거역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로 인하여 왕명을 어긴 죄로 경원(慶源)에 유배를 당하였다. 유배를 떠나면서 가족들에게 태연하게 말씀하시기를 [내 본래 함창땅 농부로서 직위가 재상에 이르렀으니 성공했음도 내탓이요 네임금을 섬기면서 차마 마음대로 물러날수도 없었으니 실패함도 내탓이로다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탓할수 있겠는가]라고 하셨다. 67세 되던해 정월에 유배지인 함경도 경원에 도착하여 정진손이란 사람의 집에서 머무르게 되었는데 그해 부인 김씨의 부음을 접하고 애도시를 지었으며 아들도 모두가 유배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일시에 온 집안이 파탄의 비운을 맞게 된것이다. 6월22일 단천(端川)에 이르렀을때 조정의 승명관이 말을 타고 달려와 선생에게 한통의 책서를 전했다. 선생께서는 [죽으라]는 책서를 읽고서도 태연한체 조용히 왕명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때 아들들도 모두 유배지에 있었으므로 곁에는 노비 몇사람 뿐이였다. 연산군의 포악함이 두려워 아무도 시신 수습 할 사람이 없었다. 노비들은 시신을 염습도 못한체 거적대기에 싸서 장례를 치렀다. 이 얼마나 비참한 최후이며 원통한 역사였던가.

1506년 중종반정으로 드디어 연산군이 폐출되고 중종이 즉위하자 언승을 비롯한 아들들이 모두 풀려났고 이듬해에 함경남도 단천으로 달려가 선생의 시신을 수습하여 고향 함창으로 돌아왔다. 중종 원년 3월13일 그의 부친 판서공 묘앞 子坐의 언덕에 장례를 치렀다. 그해 5월에 일품의 관직으로 숭정대부의정부좌찬성 겸 지경연사홍문관대제학과예문관대제학지춘추관사가 주어짐과 동시에 문광(文匡)이란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중종30년에 신도비가 세워지고 광해군 3년에 전라도 구례현에서 문집이 간행되었으며 임호서원과 양산서원에 배향되었다.

 

 

허백정선생 약사(虛白亭先生 略史)

1438(戊午, 세종20) 1

경북 상주시 함창읍咸昌邑 여물리余物里(羊積里)에서 태어나다. 휘는 洪貴達홍귀달 자는 兼善,호는 허백정虛白亭과 함허정涵虛亭이며, 시호는 문광文匡이다. 본관은 부림缶林(咸昌派)으로 부림홍씨 10세이며, 고조는 내시사內侍史 문영文永, 증조는 사재시감司宰寺監 순淳, 조는 증이조참판贈吏曹參判 득우得禹, 부는 증병조판서贈兵曹判書 효손孝孫, 모는 안강노씨安康盧氏 부사직副司直 집緝의 딸이다.

1459(己卯, 세조5) 22

진사에 합격 후 이듬해 성균관에 유학하다.

1461(辛巳, 세조7) 24

강릉별시江陵別試 문과文科에 급제하다.

1462(壬午, 세조8) 25

승문원承文院 박사博士로 관직을 시작하다.

1467(丁亥, 세조13) 30

5월 이시애李施愛가 난을 일으키자 함경도 절도사 허종許琮의 천거로 병마평사兵馬評事가 되었으며, 난을 진압한 후 군공으로 공조정랑工曹正郞을 제수 받다.

1471(辛卯, 성종2) 34

세조실록世祖實錄편찬에 참가한 뒤 수사기修史記를 남기다.

1472(壬辰, 성종3) 35

전라도全羅道 안찰사按察使를 다녀오면서 시 70여 수를 지어 남행록南行錄으로 묶다.

1476(丙申, 성종7) 39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다. 이때 원접사遠接使 서거정徐居正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중국 사신 기순祁順 등을 맞으면서 문재文才를 드러내다.

1478(戊戌, 성종9) 41

도승지都承旨가 되다.

1479(己亥, 성종10) 42

충청도 관찰사觀察使에 이어 형조참판刑曹參判에 오르다. 이때 남산 아래 초옥草屋을 짓고 살며 ‘허백정虛白亭’이라 이름 붙이다.

1481(辛丑, 성종12) 44

천추사千秋使로 중국 사행을 다녀오다. 사행을 다녀오며 많은 시를 남기다.

1484(甲辰, 성종15) 47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이어 강원도 관찰사가 되다.

1486(丙午, 성종17) 49

경주 부윤府尹이 되다. 안동 예안禮安 출신의 이현보李賢輔가 문하에 들다.

1489(己酉, 성종20) 52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이 되다. 이해 부친상을 당하여 선고先考를 함창 율리栗里에 장례지낸 뒤 묘소 부근에 초옥을 지어 애경당愛敬堂이라 당호를 붙이고 시묘살이를 하며 3년상을 치렀다. 이후 선생의 후손들이 이곳을 중심으로 모여 살게 되다.

1491(辛亥, 성종22) 54

부친의 3년상을 마친 뒤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이 되다.

1492(壬子, 성종23) 55

홍문관 대제학大提學이 되어 문형文衡의 자리에 오르다.

1493(癸丑, 성종24) 56

의정부議政府 좌참찬左參贊에 이어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내다.

1494(甲寅, 성종25) 57

호조판서戶曹判書로 있을 때 성종이 승하하자 삼도감제조三都監提調가 되어 국상을 주관하다.

1495(乙卯, 연산군1) 58

의정부 우참찬右參贊에 오르면서 세조와 예종, 성종, 연산군 4대에 걸쳐서 관직생활을 하다. 연산군이 정사政事를 게을리 하자 「구유생소救儒生疏」를 올리고, 이듬해에도 「청종간소請從諫疏」를 올리자 임금의 눈 밖에 나기 시작하다.

1497(丁巳, 연산군3) 60

공조판서工曹判書가 되다.

1498(戊午, 연산군4) 61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되어 좌천되었다가 곧 의정부 우참찬에 복직하였으며, 홍문관

대제학大提學에도 다시 올라 성종과 연산군 양대에 걸쳐 2차례 문형의 자리에 오르다.

1499(己未, 연산군5) 62

「청물거간소請勿拒諫疏」와 「청파타위소請罷打圍疏」를 올리다. 왕명으로 성현成俔, 권건權健과 함께 역대명감歷代明鑑을 편찬하다.

1500(庚申, 연산군6) 63

「의정부진폐소議政府陳弊疏」와 「정부소政府疏」를 올리다. 왕명으로 권건과 함께 속동국통감續東國通鑑을 편찬하다.

1502(壬戌, 연산군8) 65

왕명으로 윤상필尹弼商 등과 함께 구급이해방救急易解方을 편찬하다.

1503(癸亥, 연산군9) 66

무고로 삭직되어 경기도 관찰사로 나가다.

1504(甲子, 연산군10) 67

경기도 관찰사 재임 중 왕명을 가벼이 여겼다는 죄목으로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되었다가 취조를 받기 위해 다시 한양으로 오던 중 6월 22일 단천에서 교살絞殺되다. 네 아들도 이 사건에 연루되어 거제도로 유배되고, 부인은 충격으로 세상을 뜨다. 향년 67세이다. 선생의 배配는 상산김씨尙山金氏이며, 슬하에 언필彦弼과 언승彦昇 언방彦邦 언충彦忠 언국彦國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맏이인 언필은 일찍 죽고 언방과 언충은 문과 급제를 하여 여러 관직을 지냈으며 언승도 진사로 거창 현감縣監을 지냈고, 언국은 진사로 재랑齋郞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

1506(중종 원년, 몰후 2)

중종반정으로 거제도에 유배가 있던 네 아들이 풀려나고, 선생에게는 의정부 좌찬성左贊成이 추증追贈되고 문광文匡이라 시호가 내리다.

1507(중종1, 몰후 3)

유배에서 풀려난 아들들이 선생의 유해를 수습하여 함창현咸昌縣 율곡栗谷(현 문경시 영순면 율곡리) 선영 아래에 안장하다.

1535(종종29, 몰후 31)

신도비神道碑를 세우다. 신도비명은 홍문관 대제학 남곤이 짓고, 아들 언방이 글씨를 쓰다.

1611(광해군3, 몰후 107)

허백정문집虛白亭文集을 간행하다.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가 서문序文을 쓰다.

1693(숙종20, 몰후 189)

출생지인 상주 임호서원에 표연말表沿沫, 채수蔡壽, 권달수權達手와 함께 배향되다.

1786(정조10, 몰후 282)

양산서원에 배향되다. 선향先鄕인 의흥義興 대율大栗에 1783년 세덕사世德祠가 창건 되어 경재敬齋 홍로洪魯, 아들 우암寓菴 홍언충洪彦忠과 함께 배향된 뒤 3년 후 세덕사가 양산서원으로 승호陞號되다.

1843(헌종9, 몰후 339)

허백정문집속집續集을 간행하다.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의 후서를 쓰다.

1979(몰후 475)

신도비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22호로 지정되다.

2012(몰후 508)

허백정문집과 속집 목판을 수습하여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하다.

2015(몰후 511)

양산서원이 복원되어 위패를 환안還安하다.

201510

방손 철학박사 계명대 홍원식 교수가 「행장」을 요약정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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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선생 홍언충(洪彦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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