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인물
우암선생 홍언충(洪彦忠)

휘 언충(彦忠),  호 우암(禹庵),  자 직경(直卿)

缶林洪氏 11世祖

1473年生~1508年卒

언충은 허백정 휘 귀달의 넷째 아들이다. 文才가 뛰어나 17세 때 이미 병상구부(病口駒賦)를 지었으며, 23세 때인 1495년(연산군 1)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에 임명됨으로써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24세 때 정희량 박은 등 13인과 사가독서를 하였고, 이후 홍문관 정자와 저작, 박사, 부수찬을 거쳐 수찬에 이르렀으며, 예조정랑 등도 지냈다. 1498년(연산군 4) 26세 때에는 서장관으로 명나라 사행을 다녀왔다. 1504년(연산군 10) 부친의 사건에 연루되어 진안으로 유배되었으며, 다시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한양으로 와서 심문을 받은 뒤 거제도로 유배되었다. 1506년 34세 때 중종반정으로 유배에서 풀려난 뒤 성균직강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나아가지 않았고, 1508년(중종 3) 3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배위는 남손(南蓀)의 딸이고, 묘소는 영순 의곡리(옛 도연리)에 있으며,「자만사비自挽詞碑」가 묘소 앞에 서 있다. 1535년 동생 언국이 묘갈을 지었다. 1582년 외손서인 김우굉이 청주목사 김중로에게 부탁하여 그의 문집을 간행하였으며 1665년 문경 근암서원과 1786년 군위 양산서원에 부친 허백정과 함께 배향되었다.

그는 부친 허백정과 함께 조정에 있으면서 부친과 마찬가지로 연산군에 대한 간언을 멈추지 않았다. 연산군의 난정이 더욱 심해진 때였다. 그는 주색과 사냥에만 빠져들었고, 신하들의 직언직간은 모두 자기를 비방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아예 경연마저 폐하려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홍언충은 부친 허백정이 그랬듯이 경연을 폐하지 말 것을 간곡히 간하고 있다. 부자가 같은 때에 함께 직언직간을 하는 모양새이다. 결국 화도 그들에게 함께 닥치게 된다. 그가 1차로 화를 당하게 된 것은 손녀딸의 문제로 인한 부친의 불경죄에 연루되어서이다. 이때 그는 진안으로 유배형이 내려졌다. 그는 진안에 유배되자마자 바로 승정원 상소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소환 되었으며, 갖은 고초를 겪은 끝에 더 멀리 거제도로 유배를 갔던 것이다. 연산군은 궁중의 일을 함부로 짐작하여 간한 자를 아뢰게 하면서, 승정원에서 상소했던 사람의 명단을 적어 올리라는 명을 내린다. 이 명단속에 다시 그의 이름이 오른 것이다. 김안로가 지은 야담집“용천담적기”에서는 당시 국문 받을 때의 참혹한 상황이 적혀 있다.

이렇게 그는 서른두 살 젊디젊은 나이에 스스로 만사를 짓고서 아래에다 [내 자손된 자들 중 반드시 그 어느 날엔가 내 묻힌 곳에다 작은 碑 하나 세워서 이 글을 새겨 넣을 이 있으리. 그런 뒤에라야 진정한 내 자손일 것이다]라고 적어 놓았다. 비장의 감과 비애의 정이 절절이 전해진다. 그는 이 글을 짓고 곧장 세상을 뜨지는 않았지만, 머잖은 4년 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슬하에 3남을 두었으나 모두 일찍 죽어 혈손마저 끊어지고,결국 외후손들에 의해「자만사비」가 세워졌다.

우암선생 약사(禹庵先生 略史)

1473(癸巳, 성종4) 1

부친 임지인 한양에서 태어나다. 휘는 언충彦忠 자는 직경直卿, 호는 우암寓菴으로 문광공文匡公 허백정虛白亭 홍귀달洪貴達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다. 부림 홍씨 11세이다.

1489(己酉, 성종20) 17

병상구부病顙駒賦를 지어 일찍부터 문재文才를 드러내다.

1495(乙卯, 연산군1) 23

문과文科에 급제 후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다.

1496(丙辰, 연산군2) 24

정희량鄭希良, 박은朴誾 등 13인과 사가독서賜家讀書를 하고, 이후 홍문관弘文館 정자正字와 저작著作, 박사博士, 부수찬副修撰을 거쳐 수찬修撰에 올랐으며, 예조정랑禮祖正郞 등을 지내다. 선생은 정희량(호 虛庵), 이행李荇(호 容齋), 박은(호 邑翠軒)과 함께 어울려 도우道友로 지내면서 많은 시문詩文을 나누었으며, 당시에 이들은 ‘문장사걸文章四傑’로 일컬어지다.

1498(戊午, 연산군4) 26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 사행을 다녀오다.

1504(甲子, 연산군10) 32

부친의 사건에 연루되어 진안에 유배를 갔다 다시 취조를 받고 거제도에 유배되다. 선생이 진안으로 유배를 가면서 자신의 앞날에 닥칠 운명을 생각하며 비장한 마음으로 자신의 만사挽詞를 적다. 뒷날 중종반정(1506)으로 죽음을 면하기는 하였지만 「자만사自挽詞」를 새긴 비가 선생의 묘소 앞에 세워져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1506(丙寅, 중종 원년) 34

중종반정으로 유배에서 풀려난 뒤 성균직강成均直講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나아가지 않다.

1508(戊辰, 중종2) 36

병으로 세상을 뜨다. 향년 36세이다. 묘소는 도연리道淵里(현 문경시 영순면 의곡리)이다.

배配는 남손南蓀의 딸이며, 슬하에 세 아들을 두었으나 모두 일찍 죽어 후사後嗣가 없이 근래에 이르기까지 외손外孫들이 봉사奉祀하고 있다.

1535(중종29, 몰후 27)

동생 언국彦國이 묘갈명墓碣銘을 짓고 묘비를 세우다.

1582(선조15, 몰후 74)

외손서外孫壻인 충청도 관찰사 김우굉金宇宏이 발문跋文을 붙여 청주에서 우암고寓菴稿를 발간하다.

1665(현종7, 몰후 157)

문경이 근암서원近嵒書院에 배향되다. 이후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사담沙潭 김홍민金弘敏 목재木齋 홍여하洪汝河 활재活齋 이구李榘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 청대淸臺 권상일權相一이 차례로 모셔져 7인 종향從享 서원이 되다. 대원군 때 훼철된 후2011년에 복원되면서 7인의 위패가 함께 환안還安되다.

1786(정조10, 몰후 278)

양산서원에 배향되다. 선향先鄕인 의흥義興 대율大栗에 1783년 세덕사世德祠가 창건되어 경재敬齋 홍로洪魯, 부친 문광공文匡公 허백정虛白亭 홍귀달洪貴達과 함께 배향된 뒤 3년후 세덕사가 양산서원으로 승호陞號되다.

2006(몰후 498)

우암고寓菴稿를 포함한 근암서원 소장유물들이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77호로 지정되다.

2012(몰후 504)

우암고목판을 수습하여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하다.

2015(몰후 507)

양산서원이 복원되어 위패를 환안還安하다.

201510

방손 철학박사 계명대 홍원식 교수가 「행장」을 요약정리하다

리스트

목재선생 홍여하(洪汝河)
문광公 홍귀달(洪貴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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