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인물
목재선생 홍여하(洪汝河)

휘 여하(汝河),  호 목재(木齋), 산택재山(澤齋),  자 백원(百源)

缶林洪氏 15世祖

1620年生~1674年卒

홍여하는 자 백원 호 목재 또는 산택재이다. 대사간 홍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가통을 이어 허백정 홍귀달의 5대 주손이 되었다. 14세 때 모친 高氏의 상을, 27세 때 부친상을 당하였다. 35세때 생원진사시와 식년 문과에 합격하였다. 37세 봉교(奉敎)로 있을 때 송규렴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상진과 이원정을 추천한 일로 파직되었으며 다시 그해 응지상소(應旨上疏)를 올렸다가 고산도찰방(高山道察訪)으로 쫓겨났다. 당시 서인 측에서 이 상소가 윤휴 등의 배후조종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아 문제를 삼게 되면서 그는 당쟁 속으로 휘말려 들고 만다. 마침 이때는 바로 제1차 예송(禮訟)이 터진 시점이기기도 했다. 41세때에는 병마사 권우의 일을 문제 삼았다가 파직된 뒤 충청도 황간으로 유배되었으며, 얼마 후 풀려나 고향인 함창 율곡으로 돌아왔다. 율곡으로 돌아온 후에는 산택재(山澤齋)를 짓고 학문 연구와 저술에 매진하였다. 55세때 숙종이 즉위하여 병조정랑과 사간의 관직이 내려졌으나 병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예천의 흑송리에 장사 지냈으며, 뒷날 율곡리로 이장하였다. 처음 묘갈명은 권유가 지었으며, 이장 후 묘갈은 계당 류주목(柳疇睦)이 지었다. 1689년(숙종15) 갈암 이현일李(玄逸)의 주청으로 통정대부부제학에 추증되었다. 1693년 근암서원에 배향되었다.

문집으로『목재선생문집』이 있다. 홍여하는 20세때 휘찬여사(彙纂麗史) 범례를 짓고서 편찬을 시작하였다. 27세때 사서발범구결(四書發凡口訣)을 지었고, 경성판관 시절에 천군(天君)과 팔잠(八箴)을 지었다. 유배에서 풀려나 율곡으로 돌아온 뒤에는 명명덕찬(明明德贊) 존성재기(尊性齋記) 등을 지었고, 53세때 동국통감(東國通鑑)을 산절하여 동국통감제강(東國通鑑提綱) 일명 東史提綱의 범례를 만들고 편찬을 시작하였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였다. 그리고 해동성원(海東姓苑)도 편찬하였다.

 

홍여하는 17세기 후반 영남 남인의 대표적인 정치가이기도 했지만 역사가로서 더욱 유명하다. 그의 대표적인 역사 저술로는『휘찬여사』와『동국통감제강』,『 해동성원』등이 있다. 동국통감제강은 고조선부터 삼국시대까지, 『휘찬여사』는 고려시대의 역사를 담고 있다. 그는 당시 학자들이 중국의 역사에만 관심이 있음을 지적하면서 우리나라 역사에 관심을 두어야 함을 주장하였다. 제대로 된 역사서를 편찬해야 한다는 생각은 그가 젊은 날부터 가졌던 이상이며『휘찬여사』와『동국통감제강』을 짓게 된 까닭이라고 보아도 무방하겠다.

 

동국통감제강 서문을 통해 홍여하의 사관과 저술의 내용 및 역사적 위치를 가늠해 볼수 있다. 동국통감제강은 전 7권으로, 주요 내용은 은태사기(殷太師記)와 기준기(箕準記) 삼국기(三國記) 신라기(新羅記)로 되어 있다. 범례를 보면, 공자가 쓴『춘추』의 예를 따르며, 우리나라 역사는 은태사인 기자(箕子)로부터 시작하고, 기자를 이은 것은 기준이라 하여 위만을 제외시켰으며, 기준이 마한을 세웠으니 마한이 그 뒤를 잇고, 삼국 중 신라가 역년(歷年)이 가장 오래되고 통일하였으므로 신라를 주로 세우고 고구려와 백제를 부로 삼았다. 역사 정통론적 시각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음을 볼 수있다.

 

휘찬여사는 총 47권으로 목록, 범례와 세가, 지, 열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기전체(紀傳體)의 서술 방식을 따르고 있다. 홍여하의 이러한 역사 관련 저술은 그에게 당대 최고의 史家로서의 위상을 갖게 해 주었다. 또한 이것은 도학의 분위기가 압도한 영남 퇴계학파 안에서는 특이한 일로 퇴계학파 안에서의 그의 위상을 더욱 돋보이게 해 주었다. 그렇다고 퇴계학파 안에서의 그의 위상이 역사학 방면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철학방면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홍여하는 이황과 류성룡의 찬, 장흥효의 묘갈, 류진과 이휘일의 행장 등을 지었고 이현일은 그를 적극 높였다. 또 정경세는 홍여하의『휘찬여사』를 교정하고 서문을 지었으며, 뒷날 유주목은 홍여하의 묘갈을 지었다. 이렇게 볼 때, 홍여하는 17세기 전반에서 후반 갈암 이현일로 이어지는 퇴계 학통의 중심적 위치에 서 있었다고 볼수 있다. 홍여하의 대표적인 철학 관련 저술로는 독서차기(讀書箚記)와 명명덕찬(明明德贊) 존성재기(尊性齋記) 제양명집주자만년정론후(題陽明集朱子晩年定論後)등을 들 수 있다.

목재 홍여하 선생은 17세기 후반 정치가이기도 했지만 역사가로서 더욱 유명하며 부림홍문의 자랑이기도 하다.

목재선생 약사((木齋先生 略史)

 

1620(庚申, 광해군12) 1

부친 무주공無住公 홍호洪鎬가 일찍이 문과 급제를 하고서도 관직을 제수 받지 못한 채 태백산太白山 아래에 수월암水月庵을 짓고 소요할 때 그곳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나다. 휘는 홍여하洪汝河 자는 백원百源, 호는 목재木齋와 산택재山澤齋이다. 부림홍씨(함창파) 15세이다. 문광공文匡公 허백정虛白亭 홍귀달洪貴達이 5대조이며, 부친 호는 대사간大司諫을 지냈고, 母는 장흥고씨長興高氏 고경명高敬命의 손녀이자 고종후高從厚의 딸이다.

1639(己卯, 인조16) 20

고려사高麗史를 춘추좌전春秋左傳의 예에 따라 정리한 뒤 휘찬려사彙纂麗史 범례를 짓고서 편찬을 시작하다.

1646(丙戌, 인조23) 27

부친상父親喪을 당하다. 사서발범구결四書發凡口訣을 짓다.

1654(甲午, 효종6) 35

생원시生員試와 식년式年 문과文科를 같은 해에 급제하여 주위를 놀라게 하다.

1656(丙申, 효종8) 37

봉교奉敎로 재직할 때 송규렴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상진과 이원정을 추천하였다가 파직되고 같은 해 「응지상소應旨上疏」를 올렸다가 고산도高山道 찰방察訪으로 좌천되다.

1659(己亥, 현종1) 40

5월 경성鏡城 판관判官으로 있을 때 「응구언교소應求言敎疏」를 올리면서 북방 군정軍政의 폐단과 함께 조정 내 이후원李厚源의 붕당 행태를 지적하는 내용을 담아 송시열宋時烈이 속한 서인西人들로부터 큰 반발을 싸다.「천군天君」과 「팔잠八箴」을 짓다.

1660(庚子, 현종2) 41

병마사兵馬使 권우權堣의 일을 문제 삼았다가 파직된 뒤 충청도 황간으로 유배되다.

얼마 후 유배에서 풀려난 뒤 고향인 함창 율리로 돌아와 산택재山澤齋를 짓고서 학문 연구와 저술 및 강학에 전념하다.

명명덕찬明明德贊등을 짓다.

1670(庚戌, 현종12) 51

예천醴泉 북쪽 복천촌福泉村에 존성재尊性齋를 짓고서 잠시 이거하였다가 53세 때 다시 율리로 돌아오다. 「존성재기尊性齋記」를 짓다.

1672(壬子, 현종14) 53

동국통감東國通鑑을 산절刪節하여 동국통감제강東國通鑑提綱(일명 東史提綱)의 범례를 만들고 편찬을 시작하였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다. 해동성원海東姓苑을 편찬하다.

1674년(甲寅, 숙종 원년) 55세

숙종肅宗이 즉위하여 병조정랑兵曹正郞과 사간司諫의 관직이 내려졌으나 병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세상을 뜨다. 예천 흑송리에 장사 지내다. 뒤에 율곡리로 이장移葬하다. 처음 묘갈명墓碣銘은 제자인 권유權愈가 지었으며, 이장 후 묘갈명은 계당溪堂 류주목柳疇睦이 지었다. 슬하에 상문相文, 상민相民(出系), 상훈相勛, 상진相晋, 상빈相賓, 상연相連 6형제를 두다.

1689(숙종15, 몰후 15)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의 주청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부제학副提學에 추증追贈되다.

1693(숙종19, 몰후 19)

우암寓菴 홍언충洪彦忠과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이 배향되어 있던 문경 근암서원에 사담沙潭 김홍민金弘敏과 함께 배향되다. 이후 다시 활재活齋 이구李榘와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 청대淸臺 권상일權相一이 모셔져 7인 종향從享 서원이 되다. 대원군 때 훼철된 후 2011년에 복원되면서 7인의 위패가 함께 환안還安되다. 영조 정조 연간 제자 권유權愈의 서문을 붙여 목재선생문집木齋先生文集을 간행하다. 초간初刊 후 여러차례 추각追刻되었는데 이들 사이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1835(헌종1, 몰후 161)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의 서序를 붙여 (목재선생가숙木齋先生家塾)휘찬려사彙纂麗史를 간행하다. 간행 연대가 정확하지 않으며, 초각初刻 이후 일부 편차를 나누어 한 차례 개각改刻하였다. 목판은 정확한 연유를 알 수 없지만 선향先鄕에 있는 양산서원에 보관해오다.

1990(몰후 316)

8월 7일 陽山書院 휘찬려사 목판이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51호로 지정되다.

2006(몰후 332)

1월 2일 목재선생문집동국통감제강 등을 포함한 근암서원 소장 유물들이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77호로 지정되다.

2011(몰후 337)

12월 양산서원(당)에 보관해오던 (목재선생가숙)휘찬려사 목판을 경재선생실기敬齋先生實紀목판과 함께 학술발전과 영구보전을 위해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 이관하다.

2012(몰후 338)

목재선생문집, 동국통감제강 목판을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 이관하다.

2015(몰후 341)

양산서원을 복원하고 이전 3선생의 위패를 환안還安한 뒤 향의鄕議에 따라 목재 홍여하선생과 수헌睡軒 홍택하洪宅夏 선생의 위패를 추가 배향하다.

201510

방손 철학박사 계명대 홍원식 교수가 「행장」을 요약정리하다

리스트

수헌선생 홍택하(洪宅夏)
우암선생 홍언충(洪彦忠)
  • 대보사
  • 국립민속박물관
  • 문화재청
  • 한국국학진흥원
  • 성균관
  • 문화체육관광부

홈페이지에 게시된 이메일 주소가 자동수집되는것을 거부하며 이를 위반시 정보통신망법에 의해 처벌됨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