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인물
수헌선생 홍택하(洪宅夏)

휘 택하(宅夏),  호 수헌(睡軒),  자, 화로(華老)

缶林洪氏  21世祖

1752년生(임신)~1820년卒(경진)

公의 휘는 택하 호 수헌 자 화로 이다. 養父는 귀길이며 生父의 휘는 귀명 호는 쌍육당이다. 公은 1752년(영조 임신)에 출생 하였는데 어릴때 부터 자질과 재능이 뛰어나 쌍육公이 늘 칭찬하되“이 아이는 반드시 우리가문을 창성시킬 재목이니 교육을 느슨하게 해서는 아니될 것이다” 라고 하였다. 학당에 나가 학구에만 전력한 것이 아니라 집안에서도 열심히 한 결과 정조 병오년에 명경과(明經科)에 급제하였다. 승문원부정자에 제수되고 임자년에 어머니의 상을 당해 3년상을 치름에도 예의에 벗어남이 없었다. 무오년 겨울에 지평(持平)에 제수 되었다. 기미년 봄에 기랑(騎郞)으로 옮겼다가 여름에 다시 지평으로 돌아왔다.

경인년 6월에 집에 있을때 마음이 갑자기 불쾌하여 밤에 잠을 이룰수가 없었는데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물어왔다. 공은 “저절로 그러하니 나도 나의 일을 모르겠다” 고 하였다. 며칠뒤에 임금님이 승하하였다는 통보를 받고 대성통곡, 허탈하여 말을 이루지 못했다. 겨울에 서울로 올라가 임금님 장례식에 참석하고 다시 시골로 내려와 울면서 말하되 “보잘것 없는 이 몸이 천은을 입고서 티끌만큼도 보답하지 못한 체 슬픈일을 만났으니 이몸은 어찌해야 할것인고. 차라리 황량한 자연 속에서 한평생을 보냄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라고 하였다. 그러고는 날마다 시골 농부들과 농사짓는 이야기도 하고 글쓰기도 하며 한가로운 시골생활을 하였다. 백형 농헌公을 아버지 같이 섬기며 우애를 다하고 제사를 지내고 가사를 처리하며 친족들과 화목한 한때를 보냈다. 위로 봉제사는 풍성하게 하되 자신을 위한 지출은 절약하며 집안의 쓰임새는 줄이되 남을 구제하는 데는 여유롭게 하였다. 고향에 있을때도 조정에서 불러주면 서울에 올라갔다가 일이 끝나면 단 하루도 머뭇거리지 않고 바로 환향하였다. 이로 인해 조정의 권신들 중에서 公을 아는 사람들은 “세상에 드문 맑은 선비” 라고 하면서 혀를 차는 사람이 많았다. 남들이 벼슬길에 나가라고 권하면 “선비가 벼슬을 거부 하는것은 도리가 아니다. 그러나 부귀는 하늘에 달려 있는 것이니 내 어찌 무식한 천장부 짓을 하겠는가” 라고 하였다. 그후 더욱 벼슬길에 뜻이 없어 살던집 동쪽 언덕에 하나의 그윽한 골짜기를 얻어 만년에 살아갈 계획을 세웠다.

정묘년 여름 다시 지평에 제수 되었고 임신년 가을 선왕의 탄신일을 기념하여 통정(通政)에 특별승진, 갑술년에 돈녕부도정 으로 제수됨에 公이 행장을 재촉하여 길을 떠나면서 말하되 “나는 선왕 때의 노신이며 하물며 세상에 없는 은혜를 입은 사람이니 어찌 그 제사에 참석하여 은혜에 감사하지 않을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드디어 서울에 들어가 은혜에 감사하고 疏를 올려 교체된 다음 고향으로 돌아왔다. 기묘년에 다시 전직에 제수 되었으나 병을 얻어 부임하지 못했다. 경진년 여름 병이 깊어 위독하게 되자 자리를 바로잡고 앉아 방안에 있는 물건들을 치우라고 명령하고 부인을 물리친 다음 조금도 흩트러 짐이 없이 세상을 떠났다. 그 옛날 군자들의 죽고 삶의 경지를 터득했음인가.! 9월 군위군 효동 선영 밑에 장례를 치렀다. 배위는 경주김씨 기중의 따님이며 슬하에 1남1녀를 두었다.

 

 

수헌선생 약사((睡軒先生 略史)

1752(壬申, 영조27) 1

경북 군위군 부계면 대율리(한밤마을)에서 태어나다. 휘는 洪宅夏홍택하, 자는 화로華老, 호는 수헌睡軒이다. 부림홍씨 21세로, 조祖는 우익宇益, 부父는 귀길龜吉, 모母는 함안咸安 조씨趙氏  경필景泌의 딸이다. 생부生父는 귀명龜命으로 호가 쌍륙당雙蓼堂이고 문행文行으로 널리 알려졌다.

1786(丙午, 정조10) 35

식년시式年試 명경과明經科 을과乙科에 급제하다.

대과 급제 후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로 관직을 시작하다.

1795(乙卯, 정조19) 44

태상직장太常直長에서 성균전적成均典籍을 거쳐 병조좌랑兵曹佐郞, 이조좌랑吏曹佐郞이 되다.

1796(丙辰, 정조20) 45

규장전운奎章全韻 1책을 하사 받은 뒤 시를 지어 사은하다.

1798(戊午, 정조22) 47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이 되다.

1799(己未, 정조23) 48

7월 사헌부 지평으로 있을 때 경봉각敬奉閣과 흠봉각欽奉閣 두 전각殿閣을 이건하고 임금께서 친히 황단皇壇에 납시어 제사를 올리고 시를 지은 뒤 시종한 신하들에게 차운시를 짓게 하였는데, 선생도 이때 시를 짓다.

1807(丁卯, 순조7) 56

모친상을 치른 뒤 사헌부 지평에 복직되다.

1812(壬申, 순조12) 61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다.

1814(甲戌, 순조14) 63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을 제수 받다. 사은하며 사돈녕부도정소辭敦寧府都正疏를 올리다.

1819(己卯, 순조19) 68

이전 직책이 다시 내렸으나 병으로 나아가지 못하다.

1820(庚辰年, 순조20) 69

향내 유림과 종인들의 힘을 모아 양산서원陽山書院을 중수, 증축하고 「양산서원강당중수기陽山書院講堂重修記」를 짓다. 6월 15일 병으로 세상을 뜨다. 향년 69세이다. 9월 군위軍威 효동孝東에 장례지내다. 배配는 숙부인淑夫人 김씨金氏로 사인士人 기중器重의 딸이며, 슬하에 병조秉朝 1남을 두다.

1864(고종1, 몰후 44)

안동 호계서원虎溪書院에서 발의하고 의흥 향내 유림들의 공의에 따라 불천위不遷位에 오르다.

1938(몰후 118)

수헌문집睡軒文集을 발간하다.

2015(몰후 195)

양산서원을 복원하고 이전 3선생의 위패를 환안還安한 뒤 향의에 따라 목재 홍여하 선생과 수헌睡軒 홍택하洪宅夏 선생의 위패를 추가 배향하다.

201510

방손 철학박사 계명대 홍원식 교수가 「행장」을 짓고 요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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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강선생 홍천뢰(洪天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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