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인물
송강선생 홍천뢰(洪天賚)

휘 천뢰(天賚),  호 송강(松岡),  자 응시(應時)

缶林洪氏  14世祖

1564年生 (明宗 甲子)~1614年卒 (光海 甲寅)

송강선생은 고려 문하사인 경재공 휘 홍노의 5세손이며 통정대부 휘 덕기의 첫째 아들이다. 선생은 6세때부터 기절이 비범하여 비록 나이 많은 아이들까지도 그명령을 따름에 모두들 기이하게 여겼다. 18세때 부터는 활쏘기와 말타기를 익혔는데 재능과 지략이 뛰어나 당할 사람이 없었다. 공은 골격과 관상이 영특하고 평소에도 나라를 보위하고 적을 미워하는 뜻이 있었는데 예상대로 21세에 무과 별시에 합격하여 주위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었다.

당시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적들은 부산을 침입하여 약탈과 노략질을 하며 동래를 함락하고 나라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나라를 지켜야 할 지방 수령방백들은 모두 도망치고 흩어지며 나라꼴이 위태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公이 29세이던 이때 홀연히 일어나 내자신은 나라의 은혜를 입었으니 어찌 피난만 꾀할 수가 있겠는가 하고 드디어 의병을 일으켜 나라에 몸바칠 뜻을 부친 통정공에게 말씀드리며 감히 허락을 청하니 통정공은 말씀하시되 [너의 기상과 무력 책략은 족히 큰일을 담당할수 있는지라 효심보다 기꺼이 가서 나라를 먼저 지켜라]고 하셨다. 公은 통정공에게 절하고 나온후 아우들을 불러 [너히들은 늙으신 부모님을 모시고 팔공산 깊은곳으로 들어가 피신하며 부모님을 잘 봉양하라. 너히들은 부모님을 봉양하고 나는 임금님께 충성하면 그야말로 옳은 일이지 않겠는가] 라고 하셨다. 公은 결연한 마음으로 족질 혼암공 경승(慶承)과 함께 하늘을 우러러 태양에 맹세하고 의병을 모집하였다. 향병을 모집했기 때문에 의병소식을 듣고 와서 따르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 이에 영천지역 의병대장 권응수와 정대임, 정세아, 정담, 신해, 최문병, 이온수, 등 의병들과 더불어 영천에 모여 함께 왜군 토벌을 맹세 하였다. 그깃발에 쓰기를 창의정용군(昌義精勇軍)이라고 섰다. 영천 관노 희손 등이 무리를 지어 왜군과 연락하며 현읍을 돌아다니며 도적질을 함에 公이 수색하여 잡아 죽이니 향토의 도적들이 점차 수그러 들었다. 그때 적병들이 영천성내를 점령하고 있었는데 公이 선봉장으로서 먼저 화공의 계책을 세워 한밤중에 관사와 여러곳의 대문을 들러싼뒤 바람에 따라 짚이나 섶에 불을 지르며 북을 치고 적군을 쫓아가니 수많은 적병이 서로 나오다가 짓밟히며 불에 타죽거나 화상을 입은 사람이 그 수를 헤아릴수가 없었다. 그 혼란을 틈타 왜장 세명이 탈출을 하다가 두명이 公의 칼을 맞고 숨졌으며 그후 살아간 적군들이 이르기를 홍장군은 하늘이 내린 장군이다 라고 하였다.

드디어 영천성이 회복되고 좌도와 우도의 길이 트이게 되었다. 그때 경주에도 강력한 적군들이 陣을 치고 있었으므로 여러 장군들이 모여 무찌를 계책을 세웠다. 권응수 장군은 계연(鷄淵)에서 싸웠으며 홍장군은 정대임과 자인, 양산 등지에 흩어져 있는 적들을 공격하여 모두 멸망 시킨 다음 권응수 장군과 합류했다. 이에 경주성이 완전히 수복되었고 권응수 장군이 말하기를 홍공이 아니었으면 매우 위험한 싸움이였다고 하였다. 계사년 2월에 公이 병이 위독하여 대율의 정사로 돌아와 잠시 요양하였는데 여러 족친들이 날마다 위로하였다. 7월에 병이 치유되어 陣으로 돌아가니 사기를 잃고 있던 군사들이 기뻐하며 축하를 하고 군사 진용이 다시 정돈되었다. 이로부터 여러번 전투하여 모두 승리하였으며 그런 사실이 너무 많아 다 기록할 수가 없다.

갑오년 정월에 중시에 합격한뒤 을미년 2월에 어모장군행훈련원첨정(禦侮將軍行訓練院僉正)승진되고 그해 12월에는 진위장군(振威將軍) 丁酉年 10월에는 현신교위훈련원정(顯信校尉訓練院正) 기해년 12월에는 정약장군(定略將軍)에서 과의교위(果毅校尉)에 각각 제수되었다. 무신년 2월에 선조대왕이 승하하자 公은 서울을 향해 통곡하였으며 이때부터 벼슬길에 뜻을 버리고 고향에 작은 정자를 지어 거기서 기거하였다. 때때로 정자에 앉아 시를 읊어 뜻을 나타내기도 했는데 갑인년 3월에 지병이 악화되어 그달 20일에 고향에서 세상을 떠나시니 연세가 51세였다. 7월에 칠곡 산당의 오좌원에 장례를 치렀는데 천계2년 봄에 증병조참지 가을에 증병조참의의 직첩이 내려졌다. 이것이 公의 일생 이력이다. 公께서는 임진왜란을 당하여 만백성이 허둥대고 향토 벼슬아치들이 도망 쳤을때 홀연히 일어나 의병을 일으켜 충성심을 다하여 나라를 지켰으니 公의 수많은 공훈과 위대한 충열은 능히 태상사(太常寺)에 기록하고 金石에 새길만 하도다. 훗날 公에 대한 구국정신은 철권에 그이름이 기록되고 현지(縣誌)에 그 공로가 등재 되엇으며 학봉 김성일 선생의 [임진록]에 표출되어 있고 여헌 장현광 선생의 조위문에 특별히 쓰여져서 영천을 지나는 사람들은 公의 전공에 감격에 겨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것은 公의 不朽한 업적을 증명함이니 어찌 포상의 경중만으로 따질수 있겠는가.

公의 配位는 순창설씨 충의공 尉勤의 따님으로 세아들을 두셨으니 엄(曮) 돈(暾) 경(曔) 이다. 公의 후손인 진호(震浩)가 선조의 높은 공훈과 뛰어난 업적이 잊혀져 감을 애통하게 여겨 찬양할 방법을 도모한 끝에 임진왜란 중의 일기 등을 취하여 한권의 책으로 엮어 남겼다.

위의 내용은 公의 방계 후손 통정대부 전행돈령부도정 택하(宅夏)가 정조 17년 행장에 서술한 내용을 간추린 것이다.

리스트

무주公 홍호(洪鎬)
수헌선생 홍택하(洪宅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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