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인물
선천公 홍인걸(洪仁傑)

휘 인걸(仁傑),  호 선천(宣川),  자 사호(士豪)

缶林洪氏  14世祖

1581년 辛巳生~1639년 己卯卒

선천公은 허백 홍귀달선생이 고조이며 증조는 진사公 휘 언국, 조부는 휘 경민, 부는 부호군 휘 응상이다. 조부인 언국이 만년에 문경 호계에서 은거했기 때문에 그의 자손들이 이곳에서 살게 되었다. 그는 어릴때부터 영특하여 사람됨이 준걸스럽고 지도력이 있었다. 무주公 홍호 와는 종형제 사이였으며 연령과 뜻이 같아 어릴때부터 항상 함께 놀고 학습하였다. 公의 학문이 날로 진보하여 훗날 크게 성공할 것으로 기대했는데 당시 상황은 임진왜란이 지난 뒤에 선조임금이 무예를 권장했기 때문에 나라의 시운이 자신의 이상과 괴리됨을 한스럽게 여겼다. 부득이 무과를 택하지 않을수 없었으며 공의 나이 25세(1605년)에 무과 제4등으로 급제하였다. 처음으로 선전관으로 入侍하니 선조가 그의 문무겸전한 재능을 좋아하여 보살핌을 더욱 각별히 하였을 뿐만 아니라 어필(御筆66字)를 하사 하기까지 하였다.

公은 부장을 거쳐 여러번 승진, 웅천현감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친구 무주公이 벼슬을 그만두고 태백산으로 들어감에 公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두문불출하고 자질(子姪)들을 가르치기만 하였다. 公은 특히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님이 좋아하는 음식이나 약재를 구하는데 지극정성을 다하였다. 그리고 귀전음(歸田吟)이란 시를 지어 읊으면서 정부에서 여러번 출사를 받았으나 나아가지를 않았다. 인조반정 이후에 무주공과 함께 비로소 정부의 발령을 받았으나 무반생활은 公의 본뜻이 아니었기에 망설이다가 부모의 명을 어길수 없어 나가게 되었다.

계유년에 인조 생부모의 원묘(元廟)를 추숭하는 문제로 무주공과 함께 명나라에 파견되는 사신단의 자제관군(子弟官軍) 및 선래군관(先來軍官)으로 가게 되었는데 당시는 정묘호란 뒤여서 후금에 의해 육로가 막힌 상황이라 바닷길을 택하였다. 황해를 건너가는 바닷길이 산더미 같은 파도와 바람으로 심히 위험하였다. 그때 그 위험한 바닷길을 무사히 왕래할수 있었던것은 모두 공의 덕택이였다. 이 사실은 무주公의 조천록(朝天錄)에 기록되어 있다. 事行에 관한 일을 완수하고 귀국하여 조정에 보고 하였을때 인조는 크게 기뻐하여 환영연을 배풀고 노고를 치하하며 公의 품계를 높여 주었다. 그러나 공은 사양하면서 말하되 “신은 아버지의 연세가 이미 늙으셨는지라 원하옵건대 신에게 내릴 품급을 신의 아버지에게 내려 주실것을 감히 요청 하옵니다” 라고 하였다. 인조는 그 말을 가상히 여기면서 “니가 만리의 海路에서 성력을 다한것은 나라를 위해 충절을 바친 것이고 몇해나 멀리 떠나있는 동안에도 자신을 잊고 아비를 영광스럽게 하며 또 아비를 위해 품급을 요청 하는것은 효이니 너는 참으로 충효를 겸비한 사람이로다” 라고 하면서 즉시 부자의 품급을 승진시켰다. 당시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영광스럽게 생각하였으며 이 사실은 가승(家乘)에 실려있다. 그때 내려진 벼슬은 내금위장과 오위장 이었다.

1635년(을해)에 公은 선천방어사로 임명되었다가 다시 평안절도사에 부임하였는데 미구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영남전운사(嶺南轉運使)로 발령이 났다. 공은 군량미를 운반하는 배를 달천(獺川)으로 전환하고 진영을 쌍령에 주둔시킨체 어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호병(胡兵)은 갑자기 동문으로 쳐들어왔다. 뒤늦게 임금님의 행차가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남한산성으로 향했으나 호병들의 기마부대가 길목을 차단하고 있어 들어갈수가 없었다. 통곡하면서 세자와 대군들을 호위하여 강화도로 들어가려 했으나 강화유수 마져 혼미하여 아무 준비가 없었다. 이것은 公이 평생토록 한스러워 했던 사건이였다. 서로(西路)는 병자호란을 격은뒤 불모지로 변해 버렸다. 때문에 조정에서는 중신들 가운데 치안과 방어에 유능한 인사를 파견하여 오랑케를 물리치고 백성들을 보살피기로 하였는데 무인년에 公이 선발되어 창주진(昌州鎭)에 부임하였다. 당시 폐허였던 곳이 公이 부임하여 주민들과 힘을모아 노력하고 수복한 끝에 일년이 지나자 일천여호로 불어났다. 병기와 군사훈련 역시 유사시를 대비하여 만전을 기하였다. 1639년(기묘) 10월19일 관직에서 별세하니 임금님이 친히 각도에 명령, 공의 상여를 호송하도록 하고 경진년에 오정산 묘향원에 장례를 지냈다.

公은 일찍이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뒤늦게 무반이 되었다. 다행히 훌륭한 임금을 만나 여러번 특별채용이 됨에 학문은 무예에 가려지고 지조와 절개는 충효에 빛났으며 그의 청백리로서의 몸가짐과 조정에 직언극간하는 태도는 그당시 명사들이 기록하는 바이니 이는 세상에 전해야 할 훌륭한 흔적이다.

 

公의 배위 정부인 동래정씨는 총명하고 부덕을 갖추었으며 시문과 역사에도 밝았다. 시부모 섬김에 효성을 다하고 봉제사와 접빈객을 함에 모두 공의 뜻에 따라 하니 족친들과 이웃들은 공의 덕이 각별하다고 일컬었다. 부인은 公보다 일년 먼저 출생하고 일년 늦게 죽었다. 슬하에는 여해, 여연, 여원, 여제, 여완 다섯 아들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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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公 홍호(洪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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