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인물
혼암公 홍경승(洪慶承)

휘 경승(慶承),  호 혼암(混庵)

缶林洪氏  15世祖

선조25년 임진년에 일본군이 조선을 침략하여오자 선조는 위급하여 의주로 피난을 가고 나라는 풍전등화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때 혼암공은 산방(山房)에서 학업중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들었다. 公은 부모에게 효도하는 정신으로 나라에 충성하라는 부친의 명에 따라 족숙(族叔)인 송강공과 함께 의병 100여명을 모집하여 영천 의병장 권응수公의 진영으로 달려갔다. 권응수 장군은 公을 평소 알고 있었던 터라 반갑게 맞으며 송강장군에게는 선봉장을 맞기고 혼암공에게는 군량미와 격문 등 전략적인 기획과 책략수립에 참여하도록 했다. 公은 글을 읽던 서생이였던지라 무공보다는 지략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드디어 주민들을 깨우치고 설득하여 의병들이 먹을 군량미를 확보하고 또한 왜적이 점령하고 있는 창고를 습격하여 의병들의 군량미가 떨어지지 않도록 하였다. 당시 최고의 전과를 올린 영천성 공격때는 영천성을 포위하여 땔감과 식수를 차단하고 바람길을 따라 불을 질러 적군들을 섬멸하였으니 公의 책략이 컷다.

한번은 언양에서 왜군 4~5명을 발견하고 권장군이 달려가 죽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公은 적군들이 매복하여 유혹하는 것이라 하고 안된다고 하였으나 권장군은 洪公이 지나치게 우려한다면서 말을 듣지 않고 숲속에 들어갔다가 적의 매복군 공격을 받고 위기에 몰렸다. 이때 公의 기지로 위기를 모면하자 권장군은 적군의 헤아림에 밝은 혼암공과 송강장군에게 감사 하였다. 그뒤 권장군이 절도방어의 책임을 맞게 됨에 따라 公의 전공을 조정에 보고하고자 하였으나 公은 “나는 오로지 신하로서 직분을 다 하였을뿐 적군의 목을 밴 일도 없는데 벼슬이나 상을 받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라고 하면서 완고하게 사양 하였다고 한다.

그후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량료관(군량미담당관)으로 명을 받아 다시 본진에 복귀하여 혁혁한 功을 세웠다. 이때도 公의 아버지께서는“나라가 평안하면 물러나고 나라가 어려우면 나아가는 것은 신하의 도리이거늘 지금 나라가 다시 어려움에 처했는데 어찌 집에만 있을수 있겠는냐” 라고 하여 公은 개연히 일어나 “의병장의 길은 아버지의 명령이요 량료관{糧料官)의 이름은 성은에 의함일세” 하고 권장군의 막하로 달려가 관찰사 이용순 군대와 합류하였다.

7년간의 전쟁이 끝이 나고 집으로 돌아 왔을 때 公은 33세였다. 아직 벼슬을 그만둘 나이가 아니지만 公은 공명의 뜻을 접고 부모님께 효도하며 고향에 은거할 뜻을 굳힌 후 한번도 속세의 일에 관심을 갖지 아니 하였다. 전쟁시의 전공을 자랑삼아 말한적도 없으며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후회하지 않았다. 公은 경재선생의 후손답게 충효는 가문의 전통을 이어받았고 또 한강 정구(鄭逑)선생에게 배움을 받았으며 일찍이 宋朝와 우리 조선 선현들의 예론을 수집하여 거가절요(居家節要) 란 예서도 저술하였다. 대게 公이 추구한 학문은 자기 자신의 수양을 위한 학문이였을 뿐 벼슬하는 일은 그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公은 어버이의 명을 준수했으니 효자였고 적국에 대해 물러남이 없었으니 충신이었고 적을 예측함이 치밀하였으니 지혜로웠으며 전쟁터 천리길에 군량미 공급이 원할 했음은 그의 능력이 탁월했음이었다. 어려울때 나아가고 평정된 뒤에 물러남은 신하로서의 충성심이며 자신이 해야할일을 하면서 남에게 무엇을 구하지 않았음은 마땅히 훗날 사람들의 귀감이 되었다.

1605년 선무원종공신으로 책록되어 공신녹권과 公의 난중일기가 보존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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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천公 홍인걸(洪仁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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