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문동정
양산서원과 막암



불사이군’ 고려충신 홍로선생 낙향한 곳---

왜적 맞선 홍천뢰 장군 산중초소 흔적만---

◆양산서원과 막암(2017.04.04)

한밤마을에서는 군위삼존석굴(국보 제109호)을 예로부터 ‘불암(佛巖)’으로 불러왔다. 불암과 담장을 나란히 하고 있는 남쪽에는 고려말 충신 경재(敬齋) 홍로(洪魯ㆍ1366∼1392) 등을 배향하는 양산서원(陽山書院)과 척서정(陟西亭)이 있고, 양산폭포가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여기는 정몽주(鄭夢周ㆍ1337∼1392)의 문인이며 부림홍씨의 중시조인 홍로(洪魯)가 고려조 문하사인(門下舍人)벼슬을 지내다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 정신으로 낙향한 곳이다.

개경에서 고향인 이곳 한밤마을의 갖골(枝谷)과 양산서원 부근에 정착해 살다가 고려조가 망하던 날 자진(自盡)해 27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보인 불사이군의 절개는 백이숙제(伯夷叔齊)가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다가 죽은 고사와 관련지어 이 곳의 지명과 정자와 서원의 이름으로 남아 있다. 멀뫼(首山)와 양산(陽山) 등의 지명과 양산서원, 척서정, 양산폭포 등의 이름이 지금까지 전해온다.

홍로가 정착했던 갖골 유허지에는 인조 26년(1649년), 홍로선생을 배향하는 용재서원(湧才書院)을 창건했으나 영조 17년(1742년) 국령으로 훼철(毁撤)됐다.

그 후 정조 7년(1783년), 그 자리에 세덕사(世德祠)를 세워 경재(敬齋) 홍로(洪魯), 허백정(虛白亭) 홍귀달(洪貴達ㆍ1438∼1504), 우암(寓菴) 홍언충(洪彦忠ㆍ1473∼1508)등 세분을 합향했다.

그 뒤 세덕사를 확장해 서원의 체제를 갖추고 홍로의 행적이 수양산에서 굶어죽은 백이숙제와 닮았기에 양산서원(陽山書院)으로 승호(陞號)했으나 고종 5년(1868년)에 다시 국령으로 서원이 훼철됐다.

2005년에 복원하면서 추가로 목재(木齋) 홍여하(洪汝河ㆍ1620∼1674), 수헌(睡軒) 홍택하(洪宅夏ㆍ1752~1820)를 배향했다.

이 서원에 보관됐던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251호로 휘찬여사(彙纂麗史) 목판은 당대 남인사학의 태두인 홍여하(洪汝河)가 지은 기전체의 고려시대 역사서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책에는 역대 사서에 수록된 적이 없는 거란전(契丹傳)과 일본전의 외이(外夷) 부록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양산서원에 보관하던 이 목판은 현재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보관중이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국령으로 양산서원이 훼철되자 유허에 척서정(陟西亭)을 세워 홍로의 충절(忠節)을 기렸다. 수양산의 별칭이 서산(西山)이니 백이ㆍ숙제가 지은 채미가(采薇歌)에 ‘저 서산에 올라 산중의 고사리나 캐자(登彼西山兮采其薇矣)’라는 시구를 취해 정자 이름을 척서정이라 했다.

양산서원에서 서원천(뒷걸)을 따라 남쪽으로 약 200m 남짓 올라가면 양산폭포와 척서정이 있다.

1948년 무자년(戊子年), 옛 양산서원 유허지에 있던 척서정 묘우(廟宇)를 헐어 양산폭포 아래 암반 위에 누각형식으로 이건(移建)했다.

척서정에 올라 지척에서 떨어지는 양산폭포의 물소리를 듣노라면 연암 박지원의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에 기록된 물소리처럼 사람의 마음에 따라 폭포소리 또한 달라지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1895년 을미년(乙未年)에 척서정 쪽의 암벽에 ‘양산(陽山)’의 두 글자와 맞은편 바위에 ‘폭포(瀑布)’의 두 글자를 크게 새겼다.

간혹 ‘폭포(瀑布)’ 글자만 보고 ‘양산(陽山)’은 함께 새기지 않았나 하고 묻는 사람이 있는데 ‘양산(陽山)’은 바로 앞에 있는 암반에 새긴 탓에 건너편에 가야 글씨를 볼 수 있다.

◆양산서원에서 나와 한밤마을 쪽으로 가다가 황청리 마을 동편 옆으로 나있는 동산계곡의 팔공산 정상 방향으로 약 1.3㎞ 떨어진 동산교 옆 자연석에 ‘막암기(幕巖記)’라 새긴 비석이 외로이 서 있다. 이곳이 임진왜란 당시 송강(松岡) 홍천뢰(洪天賚) 장군, 혼암(混庵) 홍경승(洪慶承) 장군이 함께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산중초소로 이용했던 바위지역인 ‘막암(幕巖)’이다.

그래서 당시엔 이 바위를 새암(塞巖)이라 했던 것이다.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이 이 막암을 방문해 홍장군을 위로하고 시를 남기기도 했다.

 

팔공산의 선경(仙境) 중의 하나이면서 홍천뢰장군의 산중 거점이며 장현광(張顯光)의 장구지지(杖之地: 이름난 사람이 머무른 자취를 이르는 말)로 명성이 자자했던 막암은 1930년 경오년(庚午年) 대홍수로 유실되고 말았다.

 

동산계곡과 한밤마을 일대가 엄청난 피해를 입는 와중에 막암의 폭포도 돌과 모래에 묻혀 안타깝게도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오은(五隱) 홍기우(洪麒佑ㆍ1827~1912)는 막암기(幕巖記)에서 ‘팔공산 바로 아래 동북쪽으로 10리에 막암(幕巖)이 있는데 옛 이름은 새암(塞巖)이다.

여헌 장현광이 우리 선조 송강 홍천뢰(洪天賚) 공과 홍경승(洪慶承) 공을 여러 차례 찾아왔다. 이런 연유로 막암(幕巖)이라 개명하였다.

(直公山下東北十里許有幕巖巖古號塞巖旅軒張先生訪我族先祖松岡翁及我先祖混庵公累度尋眞改命曰幕巖何以謂也)’고 했다.

또한 호은(湖隱) 유원식(柳元軾ㆍ1852~1903)은 공산유록(公山遊錄)에 ‘다음날 함께 막암(幕巖)으로 갔다. 막암은 여헌 장현광 선생의 장구지지(杖之地)이다.

떨어지는 물줄기는 흰 눈과 같았고, 맑은 연못은 거울과 같아서 술 한 잔에 시 한수를 읊을 만 하였다.

깊은 정감을 화창하게 펼치고자 하였으나 최응팔이 이를 사양하였다.

(翌日偕往幕巖巖卽旅軒先生杖地也飛瀑噴雪澄潭開鏡一觴一詠足以暢敍幽情應八以事辭去)’는 기록을 남겼다.

군위의 향맥(1991년)에 ‘막암은 팔공산의 크고 작은 여러 골짜기에서 내려 온 물줄기가 이곳에 와서 약 10여 평 넓이의 평평한 바위를 지나는데 그 바위 아래는 열대여섯 사람이 쉬이 들어 갈 수 있도록 생겼다.

그 바위 안에 들어가면 폭포의 물줄기가 밖을 막아주기 때문에 밖에서는 물줄기만 보이고, 바위 안쪽의 굴은 보이지 않는다’고 하였다.

홍우흠 영남대학교 명예교수는 ‘막암계의 막암(幕巖)이란 문자 그대로 천막과 같이 생긴 바위란 뜻이다’ 라고 했다.

그럼 이 막암은 어디에 있는 바위인가? 한밤마을에서 동남쪽을 향해 깊고 험한 계곡을 따라 팔공산 중턱에 이르면 고산심학(高山深壑)의 맑고 찬물이 한 곳으로 모여 비류직하(飛流直下)하는 폭포가 있다.

날아 떨어진 폭포수는 세차게 용트림을 하면서 하나의 명경선담(明鏡仙潭)을 이루고 있는데, 그 선담 옆을 둘러보면 수십 명의 시인묵객들이 무릎을 마주하며 풍류를 즐길 수 있는 천연 반굴(反屈) 암반(巖盤)이 찾는 사람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때문에 언제부터인가 그 반굴 암반을, 하늘이 장막을 덮어 햇빛을 가리고 비를 피할 수 있게 한 바위란 의미로 막암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그 신비스러운 선경의 반석을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 여헌 선생도 그 중의 한 분이었다.

여헌선생이 ‘막암’의 빼어난 경치를 보고 읊은 시조 한수가 전해온다.

바위로 집을 짓고, 폭포로 술을 빚어

송풍(松風)은 거문고 되고, 조성(鳥聲ㆍ새소리)은 노래로다.

아희야 술을 부어라 여산동취(與山同醉)하리로다.

또는 여헌선생이 지은 ‘홍천뢰(洪天賚) 장군에 대한 뇌문( 文)’을 통해 임진왜란 당시 홍천뢰(洪天賚) 장군의 인품과 전공의 전말을 잘 알수 있어 팔공산 지역의 의병사 연구에 소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막암은 여헌 선생의 장구지지(杖之地)로 이 지역의 유학의 중심지가 됐다. 이곳에 막암서원(幕巖書院)을 세워 장현광 선생과 홍천뢰 장군, 홍경승 장군의 배향(配享)을 추진했던 사실은 문곡(文谷) 홍흔(洪昕ㆍ1601∼1653)이 지은 ‘막암서원영건시통문(幕巖書院營建時通文)’과 ‘막암서원상량문(幕巖書院上樑文)’을 통해 알 수 있다.

그 뒤 막암서원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서원 영건이 성사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런 사실은 죽와(竹窩) 최주원(崔柱元ㆍ1648~1720)의 ‘막암에서 모임을 가지다(會幕巖)’는 시에 ‘숭사(崇祠)는 훗날에 반드시 이루어지리라(崇祠他日必然成)’라는 시구로 알 수 있다.

八公勝地不虛名 / 팔공산 승지가 허명이 아니어서

杖當時倍麗明 / 선생의 당시 자취 있어 더욱 빛나네.

巖幕遺墟千疊護 / 막암의 유허는 천첩(千疊) 봉우리 감싸니

松琴餘韻萬年淸 / 솔바람의 여운은 영원토록 맑구나.

花垂谷谷靑山艶 / 골마다 꽃 가득하니 청산이 아름답고

水落層層白石生 / 물이 층층으로 떨어지니 흰 바위가 드러나네.

奠奉豈無秘址 / 숨은 터에 제사 지냄을 어찌 아낄 것이며,

崇祠他日必然成 / 숭사(崇祠)는 훗날에 반드시 이루어지리라.

 

글=홍종흠 팔공산문화포럼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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