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문동정
육지속의 제주도









‘육지속의 제주도’…한밤마을 돌담길 따라 부림 홍씨 본향을 걷다

학사로 사용되었다는 대청 앞 잔디밭에서 낙엽을 줍고 있는 여인들. 대율동중서당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한밤마을은 전통신앙과 불교 및 유교문화가 어우러진 팔공산의 대표적인 전통문화마을이다.

오래된 마을이란 뜻으로 천년마을이란 별명이 붙어 있기도 하다.

이 마을은 남쪽에 1000m 내외의 팔공산 주능선이 뻗어있고 남쪽에서 북쪽으로 비스듬히 경사를 이루며 동네를 이루고 있다.

한밤마을 황청리에 청동기시대 무덤인 탁자식(북방식) 고인돌이 있었다고 해 선사시대 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시대에는 화랑(花郞)을 미륵(彌勒)의 화신으로 여겼다.

 

화랑 김유신(金庾信)을 따르던 무리를 용화향도(龍華香徒)라고 했던 예로 볼 때 보물 제988호로 지정된 대율리 석불입상, 즉 미륵불은 한밤마을에 머물면서 팔공산에서 수련하던 화랑들의 정신적인 구심점이자 귀의처였다.

고려사에 ‘부계현(缶溪縣)은 현종 9년(1018년) 상주목에 내속(來屬)하였다가, 뒤에 선주(善州)로 옮겨 소속되었다. 별호(別號)는 부림(缶林)’이란 기록이 가장 오래되었다.

한밤마을에는 서기 1100년 이전, 고려 중엽에 재상을 지낸 부림홍씨 시조 홍난(洪鸞)이 현재 양산서원 근처의 갖골(枝谷)에 정착하면서 부림홍씨의 본향이 되었다.

1392년 고려말에 정몽주의 문인으로 문하사인(門下舍人)을 지낸 경재(敬齋) 홍로(洪魯ㆍ1366~1392)가 불사이군(不事二君)을 이유로 낙향하면서 한밤마을은 동성반촌(同姓班村)으로 발전하여 부림홍씨(缶林洪氏)의 집성촌이 됐고 영천최씨(永川崔氏)와 전주이씨(全州李氏) 등과 함께 어울러 살고 있다.

홍로(洪魯)는 마을의 옛 이름이 대식(大食), 대야(大夜)라 했던 것을 대율(大栗), 즉 한밤으로 고쳤다고 한다. 대식(大食)은 한밥, 대야(大夜)는 밤이 길다는 의미의 한밤으로 의미는 같지만 한자를 달리 표기하던 것을 대율(大栗)로 통일하였다.

대구에서 한달음에 달려와서 한티재에 올라서니 동쪽으로 오도봉과 비로봉, 그리고 천왕봉을 비롯한 팔공산 정상부가 우뚝하고, 팔공산 종주능선에서 이어진 산줄기가 한밤분지의 서쪽과 동쪽에서 에워싸고 있어 팔공산의 맑은 정기가 한밤마을로 절로 모이는 형국이다.

꾸불꾸불한 한티재를 내려가니 저 멀리 바위절벽 석굴에서 아미타삼존석불이 손짓한다.

이곳의 행정구역은 부계면 남산리. 여기는 부림홍씨들이 처음 정착한 곳으로 넓은 의미에서 한밤에 포함된다.

 

한밤은 이 골짜기 안에 있는 대율리와 동산리, 남산리를 아우르는 지역 및 정서적 공동체로서 대율리를 큰 한밤, 동산리와 남산리를 작은 한밤으로 불렀다.

한밤마을 입구에 마을을 소개하는 안내판 뒤로 자연석 바위에 새긴 수해기념비(水害記念碑)가 풀밭에 서있다. 기념비에는 1930년 경오년(庚午年) 7월13일 오후 3~7시 사이에 팔공산 일대에 내린 집중호우로 동산계곡에서 산사태가 일어나 한밤마을이 혹심한 피해를 입었던 가슴 아픈 사연이 기록돼 있다. 성안숲은 앞걸(남천)과 뒤걸(서원천)의 합류 지점 위에 팔공산의 지기를 막아 마을의 복을 내보내지 않으려는 수구막이를 위해 조성한 비보림(裨補林)으로 한밤마을의 성역이자 주민들의 정신적 근거지다.

진동단의 돌 오리 솟대.

이곳에는 동신제를 지내는 진동단(鎭洞壇)이 있는데, 파계사 진동루(鎭洞樓)와 같이 지기를 제압하는 뜻이 담겨있다. 진동단은 예전에는 ‘비신’ 또는 ‘비신대’라고 하여 돌무더기 위에 팔공산에서 정결한 나무를 베어 오리를 조각해 놓은 솟대로 매 3년마다 비신을 새로 세웠으나, 시대가 변하자 비신을 영구히 보존하기 위하여 팔공산에서 나온 돌로 조각해 지금의 진동단(鎭洞壇)을 세웠다.

한밤마을은 배 형국을 하고 있어 배가 가라앉는다고 해 샘을 함부로 파지 않았다.

진동단은 배의 돛대를 상징한다고 한다.

성안 숲에 서있는 홍천뢰 장군의 추모비와 홍경승 장군의 기적비. 홍천뢰 장군의 추모비 전면의 글씨는 고 박정희 대통령이 썼다.

성안숲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영천성 수복에 선봉장으로 활약했던 송강(松岡) 홍천뢰(洪天賚) 장군의 추모비(追慕碑)와 군위지역 정대장으로 홍천뢰 장군과 함께 출전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던 혼암(混庵) 홍경승(洪慶承) 장군의 기적비(紀蹟碑)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1973년 5월에 건립된 홍천뢰(洪天賚) 장군 추모비(追慕碑)의 전면글씨는 고 박정희 대통령의 글씨로 유명하다.

고려 초기에 조성된 삼층석탑 1기가 동산2리 신리에서 출토되어 대율초등학교 앞 성안숲에 옮겨놓았으나 1989년 도난당해 현재 석탑의 1층 기단부만 남아있다.

한밤마을 안길은 승용차가 비켜갈 만큼 널찍하게 뚫려있다.

돌담 위에는 호박넝쿨이 걸쳐있고, 크고 둥근 호박이 가을볕에 누런 몸통을 드러내고 있었다.

 

옛날 귀신을 쫓기 위해 심었다는 엄나무 두 그루가 돌담가에 가시를 날카롭게 드러낸 채 천왕문의 사천왕처럼 대문을 지키고 서있다.

한밤마을 부림 홍씨 종택의 안채.

보물 제988호 대율리 석불입상을 둘러보고 ‘정겨운 옛 돌담’과 ‘부림홍씨종택’을 알리는 안내표지판을 따라 가본다. 경운기가 겨우 다닐 수 있을 정도로 길이 좁아진다.

큰길의 돌담이 반듯반듯한 것과 비교하면 자연미가 훨씬 더 살아있다.

오랜 경험은 S자로 구불구불하게 쌓아야 돌담이 튼튼하고 오래간다는 것을 알았고, 돌담의 아름다움은 덤으로 따라왔다.

‘한밤돌담 옛길’ 안내판이 있는 골목은 소가 겨우 다닐 정도로 협소하지만, 돌담 위로 녹색 카펫 같은 이끼가 덮였고, 싱싱한 돌나물이 침샘을 자극한다.

한줌의 흙이 금보다 더 귀했던 시절, 흔해빠진 돌을 치워 한 뼘이라도 마당과 텃밭을 더 넓히려고 쌓아 만든 돌담에는 인고의 세월이 무심한듯 녹아있다.

얼마나 돌이 지천이었으면 육지의 제주도라 했을까.

솟을대문이 우뚝한 부림홍씨(缶林洪氏) 종택은 한밤마을 부림홍씨들의 정신적인 구심점이다.

한밤마을이 경상북도와 팔공산을 대표하는 전통문화마을로 전승, 발전하는 상징이 되었다.

한밤마을에는 양산서원을 비롯한 경의재(敬義齋), 경회재(景檜齋), 동산정(東山亭), 동천정(東川亭), 애연당( 然堂), 수오정(守吾亭), 저존재(著存齋) 등의 재실과 정자가 13개나 있다.

한 마을에 이처럼 많은 재실과 정자가 있는 곳은 찾기 힘들다.

양산서원과 재실, 그리고 정자를 중심으로 선조를 추모하는 한편, 학덕을 기리고 현창하면서 한밤마을의 전통문화를 전승, 발전시키는 토대가 되었다.

4개의 골목이 만나는 마을 중앙에 위치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62호인 대청(大廳)은 전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전각이다.

집회와 주민들의 휴식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쌍봉(雙峰) 정극후(鄭克後ㆍ1577~1658)의 부계서당기(缶溪書堂記)에 ‘신라시대에 건립되었으며 임란으로 소실된 후 1632년에 중건된 마을 유일의 건물’이라 하여 대청은 신라시대부터 유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대청의 기단부 전면에는 다듬은 돌을 덧대어 길게 이어놓아 눈길을 끈다.

이는 경주 불국사에서도 볼 수 있는 바닥파임방지돌로 처마에서 떨어진 낙수물에 바닥이 파이지 않도록 설치한 것이다.

현재는 대청 처마의 낙수물이 기단부와 방지돌 사이에 떨어지고 있어 신라시대의 대청은 지금보다 그 규모가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청에는 1906년 완성군(完城君)이 쓴 ‘대율동중서당(大栗洞中書堂)’ 현판이 걸려있고, 안쪽에는 1940년 이전부터 있었다는 ‘노래헌(老來軒)’ 현판이 걸려있다.

1929년 이전에는 부계정(缶溪亭)으로도 불렸다고 전한다.

 

1596년 오한(鰲漢) 손기양(孫起陽ㆍ1559~1617)이 지은 ‘부계사정(缶溪社亭)’의 시로 보아 예로부터 ‘부계정(缶溪亭)’으로 불리었음을 알 수 있다.

一洞溪山勝 / 산계곡 한 동네 경치가 빼어나고

千年習俗醇 / 순후한 풍속이 천년을 이어졌네.

林間烟火少 / 숲 사이로 작은 불빛 밝게 보이고

亭上笑談新 / 정자 위에 소담(笑談)이 이어지네.

詩酒桑麻興 / 시와 술을 나누며 농부와 친하니 흥이 나서,

翁孫叔姪親 / 조손과 숙질간에 더욱 친밀해지네.

何妨敦義分 / 의분은 돈독하게 나누어도 무방하고

共酌太平春 / 함께 술잔을 나누니 봄은 더욱 태평하구나.

군위군에서 가장 오래되었으며 상매댁, 쌍백당으로도 불리는 남천고택.

대청 동쪽에 담을 연하고 있는 남천고택(南川古宅ㆍ上梅宅)은 원래 ‘흥(興)’자형으로 배치된 민가로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357호(1999.03.01.)로 지정되었다.

 

현종 2년(1836년)에 지어진 이 집은 한밤마을 부림홍씨 문중에서 가장 큰집으로 집안에 두 그루의 잣나무가 있어 사랑채에 ‘쌍백당(雙柏堂)’ 편액이 걸려있다.

안채는 북향을 향한 ‘ㄷ’자형의 건물이다.

실용주의 개념에 따라 대청 위에 만든 넓은 다락은 물건을 보관하고 피서와 낮잠을 자는 등 다용도로 활용하고 남쪽에는 바라지문을 만들어 팔공산의 풍광을 즐길 수 있도록 건축하여 살림집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다.

글=홍종흠 팔공산문화포럼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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