읍청루 복원기 (挹淸樓 復元記)



읍청루 복원기 (挹淸樓 復元記)

說文云, 樓也者重屋, 卽㊀層以上之 高層建物, 自古爲眺望秀麗風光與 瞰視人物動靜而建之者多矣. 中國之岳陽黃鶴, 韓國之 矗石嶺南樓 屬於前者, 各種都城 宮闕寺院之 門樓屬於後者之類, 挹淸樓本是慶北軍威郡缶溪面南山里所在 陽山書院之門樓, 按其書院之 由來, 則朝鮮肅宗朝義興 儒林爲繼承 高麗忠臣 敬齋洪魯先生與 朝鮮朝兩館大提學 文匡公虛白洪貴達先生及 其子寓庵洪彦忠先生 之節義精神以設立之 地方私立學校也. 其規模, 完備廟宇講堂東西齋門樓等傳統書院之 定規制度, 立址則西背甑峰東向 公山南橫㊀嶺北屛鶴巖之澗畔, 可謂天惠靈地, 培養人傑之搖籃也夫. 不但如此, 院前溪谷, 南川玉水, 灘琴演奏, 晝夜不舍, 故稱其門樓曰挹淸矣. 至朝鮮末期, 依國令毁撤全國書院之時, 陽山書院亦被殃禍, 以書堂改額之後, 挹淸樓只遺㊀張懸板而頹落消失, 使人不知其原樣, 然天運有循環, 人史有盛衰, 至於近來, 由蔣旭軍威郡守, 洪大㊀啓明大學敎授, 洪尙根軍威文化院長及洪晉圭慶北道議員等地方官民之合心協力, 自農林水産食品部受領 農村綜合開發事業基金, 以於其事業中, 爲傳統文化敎育而復元陽山書院, 將其原額挹淸樓而懸於門樓, 門則正中爲神道,左右有挾掖之木造三間矣. 嗚呼, 挹淸樓, 其端雅生動之氣象, 顯 現陽山之韻致與書院之含意也. 衆所周知, 書院實有 祭享先賢與培養後進之兩種目的, 故運營陽山書院之任員, 名實相符, 爲其目的達成, 盡心竭力而已. 又請出入此陽山書院者, 仰觀挹淸, 深想淸 白淸潔淸淡之 義而反芻於胸中, 爲明哲保身, 報國貢獻之龜鑑也哉.

《說文解字》에서는 루를 중옥 즉 일층 이상의 고층건물이라 하였으니 자고로 수려한 풍광을 조망하거나 군중의 동정을 감시하기 위해 건조된 누가 많았다. 중국의 악양루 황학루 한국의 촉석루 영남루 등은 전자에 속하며 도성이나 궁궐 및 사원 등의 문루는 후자의 유형에 속하는 것이니 挹淸樓는 경북 군위군 부계면 남산리 소재 양산서원의 대문으로 건축된 누각이었다. 양산서원의 유래를 살펴보건대 조선 숙종조 의흥 유림이 고려 충신 경재 홍로선생과 조선조양관 대제학을 역임한 문광공 허백 홍귀달 선생 및 그 아들 우암 홍언충 선생의 도덕과 절의 정신을 계승 발전 시키기 위해 설립한 지방사립학교였다. 그 규모는 묘우 강당 동재 서재 문루 등 전통서원의 정규제도를 완비했으며, 입지는 서방으로 증봉을 등지고, 동방으로 팔공산을 향했으며 남방의 ㊀령과 북방의 학암이 흘립 위요하고 있는 간반이니 그야말로 천혜의 영지요 인걸을 배양하기 위한 요람이었다. 어찌 그 뿐이랴. 원전 계곡에는 남천 옥수가 주야부사 탄금을 연주하고 있으니 그 문루를 挹淸이라 명명했던 것이다. 조선말기 국령에 의해 전국의 서원이 훼철되자 양산서원도 그 재앙에 의해 서당으로 명칭이 격하됨과 동시에 읍청루는 다만 한 장의 현판만 남긴 채 퇴락소실 그 원래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천운은 순환하고 역사는 성쇠를 반부하는지라, 근래에 이르러 장욱 군위군수 홍대일계명대학교수 홍상근 군위문화원장 및 홍진규 경북도의원을 위시한 지방관민의 합심협력에 의해 농림수산식품부로부터 농촌종합개발사업기금을 승인받은 바 그 사업 중 전통문화교육을 목적으로 양산서원을 부원함과 동시에 그 문루에 읍청루 란 옛 현판을 걸게 되었다. 문루는 중간의 신도문과 좌우 액문을 겸비한 목조 겹삼간이다. 오호라 읍청루는 그 단아하면서도 생동하는 기상이 양산의 운치와 서원의 함의를 현현하고 있다. 누구나 잘 아는 바와 같이 서원은 선현을 제향하고 후진을 배양함의 두 가지 목적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장차 양산서원을 운영하는 임원은 명실상부 그 목적달성을 위해 진심갈력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양산서원을 출입하는 분들은 읍청루를 우러러 보고 가슴속에 청백 청결 청담의 뜻을 되새겨 명철보신 보국공헌의 귀감으로 삼아주기 바란다.

2013年 3月 日

영남대학교 명예교수 文學博士 洪瑀欽 謹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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