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추모비
척서정(陟西亭)



척서정(陟西亭)

소재지 : 경북 군위군 부계면 남산리

건립년대 : 1948年 戊子

척서정이 처음 지어진 유래는 다음과 같다. 1897년(정유, 광무원년) 한실(효령면 고곡동)에 있는 덕봉재(德峯齋)를 매입하여 양산서원 유허에 3선생을 기리기 위한 척서정을 창건하였다. 당시 양산서원은 문하사인 경재 洪魯선생과 조선조 좌참찬 겸 양관 대제학을 역임한 시호 문광공 호 허백정 洪貴達선생 이조좌랑과 대제학을 역임한 우암 洪彦忠선생의 절조와 학덕을 기리기 위해 세분의 영위를 봉안한 묘우까지 있었는데 1868년(고종5년) 조정의 서원 철폐령으로 묘우와 부속건물이 훼철되고 강당만 남아있는 상태였다. 그 유허에 척서정을 지은 것이다. 그후 문중의 중론에 따라 1948년(무자) 척서정 내 묘우를 양산폭포 절벽옆 반석위에 터를 딱고 이건하여 ‘척서정’ 판액을 달고, 척서정 건물은 원래의 양산서당으로 개판(改板)하여 경재선생의 ‘추모지소(追慕之所)’로 삼았다. 양산서원은 2015년(을미) 예전의 부속건물을 모두 복원하여 재건축 하였다. 척서정은 그때 이건한 건물로서 이미 오랜 세월이 흐름에 따라 여러번 개수를 하여 지금까지 보존 관리되고 있다. 척서정이란 현액(懸額)은 고대 중국 은나라 충신 伯夷叔齊가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로 연명하다가 굶어 죽었다는 故事가 선생의 절의와 유사하여 척서정이라 현액 하였다고 한다. ‘陟西亭’ 판액은 향산 이만도(李晩燾)가 썼다.

陟西亭記

군자가 지켜야 할 바는 의(義)이다. 불의에는 죽음으로 항거하고 인륜과 세상의 도리를 세워야 한다. 수양산에서 굶어죽은 백이(伯夷)와 같은 사람이 그러하다. 백이가 죽은 후에는 다시 백이와 같은 사람이 없더니 내가 보건데 고려 문하사인(門下舍人) 경재 홍선생이 그러한 사람임을 알 수 있겠다. 선생은 불행히도 난세에 태어나 그의 재질을 펴지 못하고 일찍 죽으니 사람들이 모두 슬퍼했다. 그러나 그는 나아감이 발랐고 물러남이 발랐으며 병들음이 발랐고 또한 그의 죽음이 발라서 처음부터 끝까지 그 바름을 잃지 않았으니 능히 군자라 할 수 있겠다. 선생은 산하의 바른 기운을 타고 나셨고 낙민(洛閩)의 바른 학문을 얻었으며 조용히 스스로 수양하며 구차스레 세상과 영합하지 않았다.

선생은 포은(圃隱) 선생이 추천하여 처음으로 조정에 서니 그 나아감이 바름이요 이어 국사는 날로 그릇되어 어찌 할수 없음을 알고 고려사직의 책임을 포은에게 맡기고 병이 났다하며 저보도 기다리지 않고 말없이 돌아오니 그 물러남이 바름이요 포은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나라가 망한 것을 통곡하며 이어 자리에 누우니 그 병들음이 바름이요 임신년(1392) 7월 16일 밤에 고려 태조를 꿈에 보고 그날 아침 일찍 일어나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고 가묘(家廟)에 배알하고 어버이에게 이별을 고하고 북쪽을 향해 자리 깔고 절한후 “신은 나라와 함께 죽나이다” 하고 드디어 자리에 들어 조용히 죽으니 이날이 바로 고려가 망한 다음날로서 나라와 몸이 함께 망했으니 이것이 그 죽음의 바름이라 하겠다.

전하여 이르기를 비분강개해서 몸을 죽이기는 쉬우나 태연자약하게 의(義)에 나아가기는 어렵다고 했는데 선생은 조용히 의에 나아간 것이라 하겠다. 포은은 선죽교에서 죽고 선생은 율리에서 죽으니 비록 그 죽은 곳은 같지 않으나 의는 같은 것이다. 더욱 이상한 것은 율리는 개성에서 800여리나 떨어져있어 저보(邸報)도 오지 않는 벽지인데 어떻게 이미 망하였음을 알았으며 또한 선생의 병이 비록 위중했으나 평상시와 같이 기거하였으며 그날 죽는다는 것을 어떻게 먼저 알수 있었는지, 정성이 지극하면 앞일을 안다더니 선생이 앞일을 안것도 지성에서 나온 것이리라. 7월 16일 이후 천명은 이조(李朝)로 돌아갔다. 만약 선생이 잠시라도 더 오래 살았으면 그 땅은 이미 고려의 땅이 아니며 그 곡식은 이미 고려의 곡식이 아니었다. 비록 단 하루 일지라도 고려의 땅이 아니면 살지 않고 고려의 곡식이 아니면 먹지 않는 것이 선생의 뜻이니 어찌 포은을 따라 일찍 죽지 않을수 있었으리요.

대져 명철하게 보신(保身) 하는 것이 군자의 할 일이요 위난을 당해 순국(殉國)하는 것이 신하의 직분이다. 그러나 뜻이 보신에 있으면 순국하기 어렵고 충성만으로 순국하자면 보신하기가 어려우니 양자를 겸전(兼全)하기는 더욱 어려운데 선생은 명철보신(明哲保身) 하는 지혜와 위난순국(危難殉國) 하는 충성을 겸하여 몸을 훼상(毁傷) 함이 없이 나라와 함께 죽으니 그 충성과 절의(節義)가 일월과 같이 빛난다고 하겠다.

옛날 선생이 고향으로 돌아올 때 포은 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득지(得之) 득지(得之<경재선생의자>) 라고 했는데 만약 포은이 다시 살아있어 선생의 죽음을 보았다면 또 한번 득지 득지 라고 하지 않았을까. 수산(首山)과 양산(陽山) 두산 사이에 유사(遺祠)가 있어 후인들이 그 충의(忠義)를 흠모하며 그 터에 정자를 세웠는데 이름하여 척서정(陟西亭) 이라 했다. 이곳은 백이가 수양산에서 고사리를 캔 충의의 고사에 유래하는 말이다. 내 일찍이 그 정자에 올라 오래 배회하며 차마 떠나지 못하고 평소 마음에 느낀바를 적어 벽에 걸어두니 아..! 이는 아는 자와는 더불어 말할수 있을 것이요 모르는 자와는 더불어 말할수 없을 것이다.

후학 조병유(趙秉瑜) 삼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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