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문동정
문광公 홍귀달(洪貴達)의 생애와 저술





허백정 홍귀달은 1438년(세종 20) 경북 상주시 함창읍 여물리(당시 함창현 양적리)에서 태어났으며, 1504년(연산군 10)손녀를 궁중에 들이라는 왕명을 어긴 죄로 경원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취조를 위해 한양으로 압송되던 도중 6월 22일 단천에서 교살되었다. 자는 겸선兼善이고, 호는 허백정 또는 함허정이며, 본관은 부림缶林(일명 缶溪)이다. 그는 부림홍씨 10세로, 시조는 고려조 때 재상을 지낸 란鸞이지만 이후 세계가 일실되어 고려 중엽 직장直長을 지낸 좌佐를 기세조로 삼는다. 5세 인석仁裼과 6세 문영文永때 부림(현 경북 군위군 부계면)에서 상주尙州로 이거하였다가, 7세 순淳을 거쳐 8세 득우得禹때 다시 함창咸昌으로 이거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5세 인석 이후를 부림홍씨 함창파라 부른다. 득우는 허백정의 조부이며, 효손孝孫은 그의 아버지인데, 그의 현달로 각각 이조참판과 병조판서를 증직 받았다. 효손은 귀통과 귀달 두 아들을 두었다.

 

허백정은 7세 때 근처 남율리에 사는 외척 김온교에게서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이때 그는 늘 도끼를 품고 다니며, 집으로 돌아올 때면 송진을 따와서 밤늦도록 불을 밝혀 공부하였다고 한다. 또 버선을 아끼기 위해 집을 나서면 몰래 벗어들고 맨발로 다녔다는 일화도 전한다. 10세 때에는 주백손에게서『논어』를 배웠고, 20세 때 상산김씨와 결혼하였다. 22세때 진사가 되고, 23세 때 성균관에 유학한 뒤 24세 때인 1461년(세조 7) 강릉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그는 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 4대에 걸쳐 관직을 지냈는데, 대사헌을 거쳐 성균관대사성, 홍문관대제학을 지냈으며, 이조와 호조, 공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하고 의정부 좌우참찬을 지냈다. 외직으로는 경주부윤과 충청, 강원 및 경기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그는 25세(1462, 세조 8) 때 승문원박사로 관직을 시작하여 세조 때에는 예문관봉교, 시강원설서, 공조정랑, 예문관응교 등을 지냈고, 예종 때에는 예문관교리를 지냈다. 30세 때인 1467년(세조 13) 5월 이시애가 난을 일으키자 함경도절도사 허종의 천거로 병마평사兵馬評事가 되었으며, 난을 진압한 후 군공으로 공조정랑을 제수 받았다. 이어 성종 때 예문관학사(33세)를 시작으로 예문관전한(34세), 전라도안찰사(35세), 직제학(38세), 승정원동부승지(39세), 도승지(41세), 충청도관찰사와 형조참판(42세),한성우윤(43세), 이조참판과 강원도관찰사(47세), 형조참판(48세),경주부윤(49세), 대사헌(52세), 성균관대사성(54세), 의정부좌참찬과 이조판서(56세), 호조판서(57세) 등의 관직을 지냈다.

허백정은 34세 때『세조실록』의 편찬에 참가하였으며, 35세때는 전라도안찰사로 다녀오면서 시 70여 수를 지어『남행록』으로 묶었다. 39세(1476) 때에는 원접사遠接使서거정徐居正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중국 사신 기순祁順등을 맞이하여 문재文才를 한껏 드러냈다. 42세 때 남산 아래에‘ 허백정虛白亭’을 짓고 살았으며, 44세(1481) 때에는 천추사千秋使로 중국 사행을 다녀왔다. 이때에도 그는 여러 수의 기행시를 남겼다. 52세 때 부친상을 당하여 시묘살이를 하면서 삼년상을 치렀다. 56세 때 다시 정조사正朝使로 뽑히게 되자 병으로 사임을 청하다가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57세(1494, 성종 25) 12월 성종이 승하하자 삼도감제조三都監提調가 되어 국상을 주관하였다. 연산군 때 허백정은 의정부우참찬(58세)을 시작으로 공조판서(60세) 등의 관직을 지냈으며, 61세 때인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로 좌천되었다가 곧 우참찬에 복직하였고 여러 관직을 거치다가 다시 무고로 삭직되어 경기도관찰사(66세)로 나갔다. 67세 때인 1504년(연산군 10, 갑자년) 경기도관찰사 재임 중 왕명을 거역했다는 죄로 유배되었다 끝내 죽임을 당하였다. 그는 성종 때에 이어 연산군 때도 홍문관대제학을 겸함으로써 두 차례에 걸쳐 문형文衡을 지냈다. 또 58세 때인 1495년(연산군 1) 원접사遠接使가 되어 명나라 사신 김보 등을 맞이하였으며, 이후에도 한 차례 더 원접사를 맡았다. 연산군 즉위 초 허백정은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며, 무오사화 때에도 잠시 파직되었을 뿐 크게 화를 입지 않았다. 그는 김종직과 그의 제자인 조위, 김일손등 이른바 영남사림파 출신 관료들은 물론 훈구 척신들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연산군 때에도 별 무리 없이 관직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나 연산군이 정사는 내버려둔 채 점차 방탕하고 포악해지는 것을 보고는 이를 바로잡기 위해 연이어 간언과 상소를 올렸고, 이로 인해 오히려 점점 더 눈 밖에 나게 되어 결국 죽음을 맞이하기에 이르렀다.

 

저술로는『성종실록』편찬에 참가한 뒤에 지은「수사기修史記」, 왕명으로 성현成俔, 권건權健과 함께 펴낸『역대명감歷代明鑑』(62세), 권건과 함께 펴낸『속동국보감續國朝寶鑑』(63세), 윤필상尹弼商등과 함께 펴낸『구급이해방救急易解方(65세) 등이 있다. 1504년 허백정이 화를 당하자 그 충격으로 처 상산김씨가 세상을 떴으며, 언승彦昇, 언방彦邦, 언충彦忠, 언국彦國 4형제는 모두 거제도로 유배되었다. 2년 뒤인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연산군이 쫓겨나고 중종이 즉위하면서 아들들은 모두 유배에서 풀려나고, 이듬해인 1507년 선친의 유해를 수습하여 함창현 율곡의 선영 아래에 모셨다. 허백정에게는 의정부좌찬성이 추증되고 ‘문광文匡’이라는 시호가 주어졌다. 1535년(중종 30) 홍문관대제학 남곤南袞이 찬하고 아들 언국이 글씨를 쓴 신도비가 그의 묘소 앞에 세워졌다. 그의 문집은 1611년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의 서문을 붙여 외현손 최정호가 구례에서 간행 하였으며, 문집 속집은 1843년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의 후서를 붙여 후손 인찬麟璨이 간행하였다. 1691년(숙종 17) 함창의 임호서원에 배향되었으며, 1786년(정조 10)에는 선향先鄕인 대율大栗(한밤)의양산서원에 종향되었다. 홍문관대제학 남곤은 허백정의 신도비문에서 그를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일찍이 듣건대 국가가 태평지세이고 화숙和淑한 기운이 돌면, 사람이 나면 반드시 그 용모가 우뚝하고 그 기국이 확 트이며 그 포부가 넓고 크며 그 수립함이 뛰어나고 원대하다. 이와 같은 이가 세상에 일찍이 있지 아니함은 아니나 대개 그 수가 많지 않다. 그런 사람이 다행히 그 시대에 높이 등용되면 단정히 조정에 앉아 임금으로 하여금 성군이 되게 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인수仁壽한 삶을 누리게 해 줄 것이다. 혹 그가 만약 불행을 만나 감옥에 갇히는 욕을 보게 되더라도, 형벌을 받아 죽음에 이르게 되더라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옛 역사에서 찾아보면 진의 예대부曳大夫가 있었으니『춘추』에 그의 죽음이 기록되어 있으며, 조의 두명독竇鳴犢이 있었으니 공자께서 그를 지조가 있다고 하였다. 우리 조선에서 그러한 분을 찾아보면 찬성공이 그러하다.

 

또한 전라도관찰사 정경세는『허백정문집虛白亭文集』서문에서 그를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내가 고故판서 허백정 홍공의 글을 보고서 이른바 ‘큰 절개’ 라고 하는 것을 얻었으니, 간언을 거부하는 것에 대해 논하고 사냥하는 일에 대해 논한 두 상소가 그것이다. 바야흐로 연산군이 음란하고 포악한 짓을 하던 날에는 제멋대로 법도를 어그러 뜨리고 방자하게 예법을 무너뜨려 사람을 희롱거리로 삼고 살인을 장난거리로 삼으면서, 논사論思하는 신하를 물리치고 간쟁하는 신하를 파직하였으며 말이 혹 귀에 거슬릴 경우에는 한꺼번에 몰아다가 쳐 죽였다. 그 흉포한 위세는 감히 범할 수가 없었으니, 비유하자면 울부짖는 호랑이가 이빨을 갈고 으르렁거리면서 기세를 잔뜩 돋우고 사람을 향해 다가 오는것 만 같았다. 그런데도 능히 올곧은 의론을 주장하면서 반복하여 개진해서 임금이 하고자 하는 바를 저지시키되, 마치 다스려진 조정에서 홀笏을 단정히 들고 서서 현명한 임금과 더불어 논하듯이 하였다. 백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붓을 잡고 종이를 펴매, 정신이 한가롭고 안색이 바르게 되어 눈앞에 벌여진 형구刑具 보기를 마치 좋은 관직자리 보듯이 하는 기상이 사람들의 눈앞에 있는 것만 같으니, 아, 장엄하기도 하다. 공이 포악한 임금이 마구 으르렁거리는 아래에서도 죽지 않은것은 단지 임금의 거리끼는 마음이 간간이 발했기 때문이었으며, 끝내 먼 변방에 유배되어 곤경을 당하다가 죽은 것은 이치와 형세에 있어서 필연적인 것이었다. 그런데도 이 세상 사람들 가운데에는 혼란한 시대에 임금을 따르다가 아무런 보람도 없이 괜스레 죽었다는 것으로 공에 대해 탄식을 토하는 자가 있다. 하지만 이것은 권도權道로 대처하지 못함을 비난하는 말일 따름이다. 성묘成廟에게 받은 은혜는 저버릴 수가 없고, 몸을 맡긴 신하로서의 의리는 잊을 수가 없다. 그러니 필부처럼 도망치는 짓은 할 수가 없고, 기색을 보고 미리 떠나가는 지혜는 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즉 마땅히 곧은길을 향하여 곧장 나아가기만 할 뿐 다른 길이 없으매 단지 하나의‘사死’자만이 천명에 따라 그 몸을 편안히 하는 바탕이 되니, 보탬이 되고 보탬이 되지 않음은 따질 겨를이 없었다. 그러한 때를 당하여 만약 단지 죽는 것만을 경계할 뿐이었다면, 구차스러운 얼굴로 임금의 뜻에 영합해서 걸桀과 같이 사나운 임금을 도와 포악한 짓을 하며 살아남기 위한 일이라면 못할 짓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공이 크게 싫어하던 바이다.

 

아, 그 시대를 논하고 그 행적을 상고해 보매 큰 절개가 이와 같으니, 묘한 솜씨로 아름답게 문장을 꾸며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게 하는 것쯤이야 공에게 있어서는 여사餘事이며, 임금의 계책을 윤색해 다듬어서 한 시대의 종장이 되는 것은 다른 사람도 할 수 있는 일이다. 공자가 이르기를 “영무자ㅇ武子의 지혜는 미칠 수가 있으나 그의 어리석음은 미칠 수가 없다”라고 하였으니, 이 말이 어찌 평온한 세상에서 자신의 직임을 다하기는 쉬우나 위태로운 시기에 자신의 절개를 다하기는 어렵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나 또한 이제 참람스럽게도 공에 대해 평하기를, “성묘成廟의 이름난 재상이 되는 것은 쉬우나 폐주廢主의 곧은 신하가 되는 것은 어려우며, 화려한 문장을 짓기는 쉬우나 소박한 간언을 말하기는 어렵다”라고 말한다. 백 년이 지나고 천 년이 지난 뒤에 공의 시를 읽고 공의 글을 읽는 자라면 반드시 나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징험할 수 있을 것이다.

 

★ 두 차례 문형에 오르다

 

허백정 홍귀달은 성종 때와 연산군 때 홍문관대제학을 지냈다. 두 차례나 문형文衡의 자리에 오른 것은 무척 드문 경우로, 그자신은 물론 부림홍문에게도 더없는 영광이었다. 먼저 그는 55세 때인 성종 23년(1492)에 홍문관대제학이 되어 문형의 자리에 오른다. 당시 상황을 좀 자세히 보면, 서거정徐居正이 아주 긴 시간 동안 문형의 자리에 있다 어세겸魚世謙이 그 뒤를 이어 받았는데, 그가 상을 당하여 자리가 비게 된 것이다. 당시 의견은 분분하였다. 공석으로 비워 두었다가 상을 마치면 복위시키자는 의견부터 직위가 높은 자 가운데 뽑아야 한다는 주장과, 직위가 낮아도 상관이 없으며 적임자가 있다면 직위를 높여서라도 뽑아야 한다는 주장까지 그야말로 각양각색이었다. 후보자로 거론된 인물은 여럿이었다. 허백정을 위시하여 노공필盧公弼, 노사신盧思愼, 류순柳洵, 성현成俔, 권건權健, 신종호申從濩 등이 바로 그들이다. 실록에 그 자세한 내용이 나오는데, 마침내 1492년(성종 23) 3월 19일 성종은“홍귀달에게 직위를 승진시켜 문형을 담당하는 직임을 제수하도록 하라”라는 전교를 내린다. 당시의 사신史臣은 다음과 같이 논평하고 있다.

 

대제학은 문형을 담당하는 자이다. 노공필은 문사文詞가 부족하나 직위가 상당하다고 하여 제수하니, 사람들이 모두 마음에 만족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때에 와서 체임시키고 홍귀달을 제수하였는데, 홍귀달은 젊어서부터 저술에 마음을 두어 시문이 뛰어났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잘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대제학의 자리에 오래 있지 못하였다. 이듬해인 1493년 8월 정조사正朝史로 낙점되자 그는 병을 이유로 사피辭避를 청하였다. 곧 “이제 신을 정조사로 삼았으나, 신은 옛날부터 풍질風疾이 있었으며 병증이 하나만이 아닌 데다 치료하여도 큰 효력이 없어 어렵게 직무에 종사하니, 조경朝京하는 먼 길에는 명을 받들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라고 사피를 청하였던 것이다. 성종은 “병이 이와 같으면 개차改差하라”라고 전교하였지만, 그에 대한 조정의 비판이 계속되어 그해 10월 그는 끝내 이조판서의 직에서 파면되고 말았다. 정확히 언제 그가 대제학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1494년(성종 25) 3월 18일 어세겸에게 다시 홍문관대제학의 직을 내린 것을 보면 성종 시기 그의 첫 대제학 재임 기간은 무척 짧았다고 하겠다. 이해 겨울 성종도 승하하게 된다. 연산군 때 허백정이 언제 다시 홍문관대제학이 되었는가에 대한 기록은 실록 등의 사서에는 정확히 실려 있지 않다. 그렇지만 행장에 그가 1498년 무오사화로 좌천되었다가 문형에 복직한 사실이 실려 있으며, 실록 1500년(연산군 6) 6월 29일조에 경연관과 대제학의 자리에서 체직된 내용이 나온다. 이렇게 보면 그는 어세겸과 대제학 자리를 주고받기를 거듭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일찍이 허백정의 문명을 드날린 결정적 계기가 된 사건은 원접사 서거정의 종사관이 되었던 39세 때의 일이었다. 당시 명나라의 행인行人 왕헌신王獻臣을 수행한 기순祁順이 조선 측 문사들의 기를 누르기 위해 장문의 등루부登樓賦를 지어 60운을 내자 서거정이 허백정에게 수창酬唱토록 하였는데, 무난히 이를 해내어 모두를 놀라게 하였던 것이다. 기순은 성격이 교만하였으나 이일로 허백정을 오랜 친구로 여겨 조선에서 사신이 갈 때면 늘 그의 소식을 물었다고 한다. 이때의 글은 허백정의 문집과『황화집皇華集』에 실려 있다.『 황화집』은 영조 때 왕명으로 편찬된, 중국의 사행인들과 수창한 시문을 엮은 책이다. 허백정의 문재는 사실 아주 일찍부터 드러났다. 그가 어렸을 때(6세) 주위 어른들이 연구聯句의 시를 지으라고 했더니 즉석에서 “새가 꽃나무 가지에 앉으니, 가지가 움직이기도 하고 움직이지 않기도 한다”(鳥坐花枝, 或枝動不動)라고 읊었는데, 이때 ‘혹或’ 자를 쓴 것을 보고서 어른들이 모두 감탄하며 앞으로 훌륭한 문장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일화는 이제신이 지은『청강선생후청쇄어淸江先生ㅇ鯖ㅇ語』에 전한다. 또한 신도비문에는 허백정이 문과에 급제하였을 때 고시관이 “우리의 의발衣鉢을전할 자는 반드시 이 사람일 것이다” 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적혀있으며, 이조에서 그를 영천군수에 발령하자 서거정이 “홍모는 문한을 담당하기에 적합하므로 외직을 보임하는 것은 옳지 않다” 라는 계啓를 올려 특별히 예문관전한 겸 홍문관전한으로 임명하게 되었다는 기록도 적혀 있다. 한편 어숙권魚叔權이 찬한『패관잡기稗官雜記』에는 “김시습金時習이 영동을 유랑하다 양양부襄陽府에 이르렀을 때 누각에 걸려 있는 시를 읽고는‘어떤 놈이 이런 시를 지었는고’ 하면서 읽을 때마다 욕하기를 그치지 않았는데, 한 편의 시에 이르러‘ 이 녀석의 것은 조금 낫군’하더니 그 이름을 보고는‘과연 귀달의 시로군’이라 하였다” 라는 일화가 실려 있다. 이 모두 허백정의 문재가 특출하였음을 전하는 내용들이다.

 

★ 直臣, 결국 화를 입다

 

연산군 즉위 초 허백정은 왕으로부터 꽤 신임을 받았던 것 같다. 실록에 뜻밖의 내용이 실려 있어 옮겨 본다.

 

1495년(연산군 1, 을묘) 10월 14일, 윤필상 등이 정승 후보로 어세겸을 추천하니 어필로 홍귀달을 쓰다 윤필상·신승선·윤호가 아뢰기를,“ 신들에게 정승이 될만한자를 의논하라고 명하셨는데, 대신 이상으로서 삼공이 될 만한 자는 전하께서 아시는 바이니, 성상 마음에서 결정하실 것 이옵지, 신 등의 말을 기다릴 것 있겠습니까?”라 하니, 전교하기를, “나도 생각하는 바가 있지만 반드시 의논을 모으려는 것은 경들의 의사가 과연 나의 의사와 합치되는가를 시험하려는 것이니 사양 말고 의논하라” 하였다. 필상 등이 어세겸魚世謙의 이름을 써서 아뢰니, 전교하여 이르기를“이는 원래 내가 주의한 자이다” 라 하고, 또 어필로 홍귀달의 이름을 써서 내려 보내며 이르기를“이 역시 가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필상 등이 아뢰기를 ,“ 귀달은 벼슬길에 나온 것이 신들보다 뒤지기 때문에 자세히 모릅니다. 세겸은 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에 아뢴 것입니다” 라고 하니, 전교하기를,“ 경들의의사를 내가 이미 잘알았다” 하였다.

 

그 후 3년 뒤인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났을 때에도 허백정은 큰 화를 입지 않았다. 무오사화는『성종실록』편찬과 관련하여 김종직이 쓴「조의제문弔義帝文」을 그의 제자 김일손등이 사초史草에 포함시킨 일이 발단이 되어 일어났다. 허백정은『성종실록』의 편찬에 참가하고 있던 참이었으며, 더욱이 김종직과는 생전에 같은 영남 출신으로 도우로서 친밀한 관계를 맺었고 그의 신도비문 까지 써준 사이인 데다가 이 사건에 연루되어 참형을 당한 김일손이나 유배형을 당한 조위 등과도 친밀하게 지냈던 터여서 화를 입을 여지가 컸다. 그럼에도 그는 무오사화 때 잠시 파직되었다가 곧장 복직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어찌 보면 그에 대한 연산군의 신임이 두터웠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전에도 그랬지만 그는 무오사화 후 연산군의 난정과 폭정이 더욱 심해지면서 혼자 혹은 조정의 여러 신하들과 함께 상소를거듭 올렸으며, 경연에서는 직간을 멈추지 않았다. 이때 올린 대표적인 상소로「구유생소救儒生疏」(1495),「 청종간소請從諫疏」(1496),「청물거간소請勿拒諫疏」와「청파타위소請罷打圍疏」(1499),「 의정부진폐소議政府陳弊疏」와「정부소政府疏」(1500) 등이 있다. 상소와 직언의 주요 내용은 파탄에 빠진 백성들의 고충을 시급히 들어줄 것, 민생은 돌보지 않은 채 종묘에 제사지낼 제수를 마련한다는 명목으로 사냥에만 골몰하는 것을 중단할 것, 사치의 풍조를 막고 재정지출을 줄일 것, 불교 배척을 요구하는 유생들을 벌주지 말 것, 경연에 불참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 간언을 귀담아 듣고 간관을 내치지 말 것 등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강조한내용 중의 하나는 언로를 막지 말라는 것이었다.

 

언로는 인주가 이로 말미암아 좋은 정치를 행할 수 있는 길입니다. 언로가 넓으면 천하의 착한 일이 모두 이로 인하여 들어오고, 들어와서는 나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천하의 입이 모두 나의 과실을 말할 수 있으므로, 선은 남에게 막히지 아니하고 악은 나에게 머물지 아니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고서 나라가 다스려지지 않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언로가 막히면 상하가 막히고 끊어져 인주는 귀머거리와 같이 들리는 것이 없고 소경과 같이 보이는 것이 없으므로, 선이 남에게 있어도 취할줄을 모르고 악이 나에게 있어도 버릴 줄을 모르게 됩니다. 이렇게 되고서야 아무리 나라를 다스리려고 한들 되겠습니까?

 

그러나 연산군이 가장 싫어했던 것이 바로 간언이었던 만큼 언로를 열어 둘 리 만무했다. 왕은 이미 귀도 마음도 닫은 상태였다. 그는 간언을 신하들이 무리지어 자신을 비방하는 것이라고 여겼으며, 모두들 뒤에서는 자신을 헐뜯고 있다고 생각 하였다. 그럴수록 신하들의 간언은 더욱더 극진해졌다. 이때 간언에 나섰던 인물들의 대부분은 결국 뒷날 큰 화를 입게 된다. 허백정도 그 중의 한 사람이어서, 마침내 연산군의 눈 밖에 나고 만다. 그사이를 난신들이 파고들면서 그는 품계가 강등된 채 경기도관찰사로 밀려나게 되었다. 그는 그 직에 재임하면서도 상소를 계속하며 백성들의 실정을 전하였다. 그러던 차에 언국의 딸, 바로 그의 손녀를 궁중에 들이라는 명을 거역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때의 사건을 사극 보듯 생생히 떠올리기 위해 실록에 적힌 내용을 시간 순으로 그대로 전한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 3월 11일 경기관찰사 홍귀달이 아뢰기를, “신의 자식 참봉 홍언국의 딸이 신의 집에서 자랍니다. 처녀이므로 예궐詣闕하여야 되는데, 마침 병이 있어 신이 언국을 시켜 사유를 갖추어 고하게 하였더니 관계 관사에서 예궐하기를 꺼린다 하여 언국을 국문하게 하였습니다. 진정 병이 있지 않다면 신이 어찌 감히 꺼리겠습니까? 지금 비록 곧 들게 하더라도 역시 들 수 없습니다. 언국의 딸이기는 하지만 신이 실은 가장이기로 대죄待罪합니다” 라 하니, 전교하기를, “ 언국을 국문하면 진실과 허위를 알게 될 것이다. 아비가 자식을 위하여 구원하고 아들이 아비를 위하여 구원하는 것은 지극히 불가한 일이니, 귀달도 함께 국문하라”라고 하였다. 이어 승정원에 전교하기를, “귀달의 아뢴 말이 옳으냐, 그르냐? 이런 말을 승정원에서 입계入啓하니 어쩐 일이냐? 아울러 승정원도 국문하라” 하였다.……또 귀달에게 전교하기를,“ 누가 곧 입궐하라 하였기에 이런 패역한 말을 하느냐? 그 불공함이 이세좌가 하사주를 기울여 쏟은 죄와 다름이 없다. 대신이 이런 마음을 가지고서 관찰사의 소임을 할 수 있겠느냐? 그 직첩을 거두라”하였다.……승정원에 전교하기를, “귀달이 대신이니 백관의 사표라 할 수 있는데, 이런 불공한 말을 아뢰었다. 대저 대신이 재상이노라 하지 않고 그 마음을 경계하고 조심하면 신진 선비들이 역시 본받게 될 것인데, 그 위를 업신여김이 세좌와 같다. 승정원에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하였다.……자건 등이 아뢰기를, “귀달이 필시 그 아들이 죄를 입을까 두려우므로 와서 구원한 것입니다. 또한‘비록 곧 들게 하시더라도 예궐할 수가 없습니다’ 하는 말은 지극히 불공합니다. 신들이 지금 전교를 듣고 놀라는 마음 이를 데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전교하기를,“ 군신의분의分義는엄히 하지 않을수 없다. 군신의 분의가 엄하지 않으면 상하가 문란하여 이적夷狄이나 다를것이 없다. 이러므로 자주 전교와 전지를 내려 폐습을 없애려는 것인데, 그럭저럭 고쳐지지 않고 오늘에 이르렀다.…… 신하로서 죄가 무엇이 불경보다 크겠는가?…… 이 때문에 이어 대간이나 재상 된 자들이 서로 붕당이 되어 인군을 위에 고립되게 하니, 이렇게 하기를 그치지 않는다면 우리나라의 오래되고 먼 왕업王業이 반드시 장차 떨어지고 말 것이다. 앞서 무오년 붕당의 무리들이 이미 중한 벌을 받았으니 앞 수레의 엎어짐을 역시 거울삼아야 할 터이나, 그런 폐습이 다 없어지지 않고 아직도 남아 있으니 없애지 않을 수 없다. 물에 비한다면 아직 터지지 않았을 때에는 둑을 쌓아 막을 수 있지만 무너져 넘친 뒤에는 사세가 막을 수 없는 것이다. 예전에 이르기를‘네가 면대하여서는 따르고 물러가서는 뒷말하지 말라’하였는데, 재상들이 항상 인군의 앞에서는 모두들‘인군의 명은 죽어도 피할 수 없다’하지만 물러가게 되면 말과 사실이 다르니 이 어찌 되겠는가? 지금 귀달이 이처럼 아뢰게 것은 대개 이세좌가 공경스럽지 못한 죄를 범했는데도 중한 죄로 다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패역한 말은 친구간이라도 좀 높은 자에게는 감히 하지 못할 것인데 하물며 인군의 앞에서이겠는가? 국문하라”하였다.……사헌부에서 아뢴 귀달의 추안推案을 내려 보내며 이르기를,“귀달이 그 아들 언국의 죄 입을 것을 두려워한 것이나, 그‘딸자식이 병이 있어 낫지 않았으니, 비록 곧 명하여 들게 하더라도 아마 예궐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는 말은 아들을 비호한 뜻이 확실하니 시추時推로 조율調律하라. 대저 부자간이 전쟁 때라면 서로 구원해야 하겠지만 이런 일에 있어서는 서로 구원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라고 하였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 3월 13일의금부가 아뢰기를, “홍귀달의 죄는 참대시斬待時에 해당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사형을 감하여 장杖으로 속바치고, 부처付處하라”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재상이 귀양갈 땐 낭청郞廳이 압령해 가는 것은 역시 전례가 있다. 그러나 경한 죄를 범한 것이라면 가하되, 귀달과 같이 분한 마음을 품고 말이 불공에 관계된 사람은 그죄가 이와는 유가 다르다. 낭청으로 하여금 압령해 가게 하는 것은 재상의 체모를 돌봄이니, 귀달은 옥졸로 하여금 압령해가게 하는 것이 어떤가?”라고 하였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 3월 13일이계동 등에게 전교하기를, “이세좌가 대신으로서 불경죄를 범하였으니 무릇 재상 된 자는 의당 세좌로 경계를 삼아야 할 것인데, 홍귀달이 그 아들을 비호하려고 한 말이 불공하여 위를 능멸하기를 이와 같이 하였다. 귀달로 말하면 한때의 사표였던 사람으로 학문이 높았으니 어찌 사리를 모른다 할 수 있겠는가? 또 말의 불공함이 이렇기 때문에 죄주기를 이와 같이한 것이다. 귀달이 선왕조를 섬겨 오며 직위가 재상의 중임에 이르렀는데, 내 대에 와서 죄주기를 이렇게 하게 되니 마음에 편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나는 대신을 존중하는데 대신이 나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업신여김이 이러하니, 지금 위를 능멸하는 풍습을 고치고자 하므로 죄를 주고 용서하지 않는 것이다. 그 배소를 써서 아뢰라” 하였다. 의금부에서 경원慶源·강계江界·삭주朔州세 고을을 써서 아뢰니, 전교하기를,“ 세고을로 가는데 얼마나 걸리는가?” 하였다. 의금부에서 아뢰기를, “경원은 19일, 강계는 15일, 삭주는 11일 거리입니다”라 하니,전교하기를,“ 경원으로 유배하라”하였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 3월 13일전교하기를,“ 홍귀달의 추국이 어찌 이렇게 느린가? 이도필시재상이기 때문에 이러는 것이니, 모두 위를 업신여기는 풍습이다. 의금부 당상을 불러 이 말을 하라. 또 귀달은 이미 직첩을 거두었으니 재상의 준례로 할 것이 아니다. 옥에서 목에 자물쇠를 채웠는가?”라 하였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 3월 14일 전교하기를, “이세좌·홍귀달이 불경죄를 범하였으니, 모두 왕도王都에 돌아오지 못할 자이다. 도중에서 반드시 병을 칭탁하여 지체할 것이며, 또한 연도의 수령이나 찰방들도 반드시 실어다 주며 위로해 보낼 것이니, 유시를 내려 그렇게 하지 말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 3월 14일 대사헌 홍자아, 대사간 최인, 장령 경세창, 정언 신봉로가 아뢰기를,“ 홍귀달 역시 불경죄를 범하였는데, 사형을 감하여 장형杖刑으로 속바치게 하셨습니다. 이런 큰 죄인을 마땅히 율대로 죄주지 않고 다만 경원으로 귀양 보내게 하셨으니, 신 등은 율에 의하여 논단할 것을 청합니다” 라고 하니 ,전교하기를, “세좌와 귀달이 다 중한 죄를 범했다. 그러나 세좌는 내가 손수 술잔을 주었는데 엎질러 쏟고 마시지 않았고,귀달은 그 아들을 구원하려다가 말이 불공을 범하게 되었으니, 그 죄가 차이가 있다. 세좌는 장형을 속바치게 하지 않았는데 귀달은 장형을 속바치게 한 것은, 귀달이 일시의 사표였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자아 등이 다시 아뢰기를, “세좌를 전 배소인 온성이나 그 이웃 고을로 귀양 보내고, 귀달의 죄도 경하지 않으니 그 해당 율로 논단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귀달의 범죄는 다만 불경죄이므로 장형을 속바치고 한 것이고, 멀리 귀양 가게 한 것은 무릇 대신일지라도 작은 죄라면 너그러이 용서해야겠지만 이런 큰 죄는 가려 용서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라고 하였다. 자아 등이 다시 아뢰기를, “듣건대 세좌· 귀달의 추안을 들이게 하셨다는데, 만일 그 율의 죄명을 상고하신다면 유배 위에 반드시 그 죄가 있을 것이니 율을 상고한 뒤에 처치하도록 하소서. 귀달이 비록 세좌와 다르다지만 불경죄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역시 율에 의하여 죄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라고 하였다.……자아 등이 다시 아뢰기를, “귀달의 조율이 옳게 된다면 그 죄가 형장은 속바치고 멀리 귀양 가는 데 그치지 않을 것이니 반드시 율대로 하시며, 세좌의 죄도 다시 조율하여 그 죄를 다 받게 하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였는데, 전교하기를, “내일 정부·육경六卿및 대간들을 불러 함께 의논 하겠다” 하였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 3월 16일 홍귀달이 양근楊根까지 갔는데 다시 잡아오게 해서 승지 이계맹으로 하여금 성 밖에서 형장 때리는 것을 감독하게 하고, 귀달에게 말을 전하기를“군신의 분별이 없고 위를 능멸하는 풍습이 있는데, 반드시 먼저 노성한 재상을 죄준 뒤에라야 아랫사람들이 경계할 줄 알겠으므로 이렇게 하는 것이다”하였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 윤 4월 8일 승지 이계맹이 아뢰기를, “홍귀달을 이미 경원에 정배 하였습니다” 라고 하였다.

 

허백정의 죄목은 아들 언국이 딸을 궁중에 들이지 않은 죄를 감싸려다 불경을 저지른 것이었다. 특히 문제된 것은 손녀딸을 궁중에 들이지 않은 것보다도 왕에게 아뢴 내용 중“지금 비록 곧 들게 하더라도 역시 들 수 없습니다” 라는 대목이었다. 이것이 왕명을 가벼이 여기고서 따르지 않는 것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당시 연산군은 약간이라도 자신의 뜻에 거역하거나 눈 밖에 나면 가차 없이 중형을 내렸다. 그는 간관과 여러 신하들이 자기앞에서는 굽히는 듯하지만 뒤에서는 붕당을 지어 자신을 험담하며 얕보고 있다는 생각에 젖어 있었다. 이러한 때에 간언을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가뜩이나 연이은 상소로 눈 밖에 나있던 참에 마침 손녀딸의 문제가 불거진 것이다. 기다렸다는 듯 그에 대한 유배 결정은 단 2, 3일 만에 전광석화처럼 처리되었으며, 곧장 유뱃길에 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이미 처리 과정에서도 보았다시피 사헌부에서는 형량이 가벼움을 끈질기게 진달하였다. 그를 유배 보내 놓고도 연산군의 노여움은 가라앉질 않았고, 광포함은 광란의 지경에 이르렀다. 이윽고 불길은 생모 윤씨 폐비사건으로 옮겨 붙었으니,이른바‘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 윤 4월 17일

승정원이 서계하기를, “기해년 6월 5일 회릉懷陵을 폐위할 때, 승지는 홍귀달· 김승경· 이경동·김계창 ·채수· 변수요, 주서는 신경·홍형이요, 사관은 최진·이세영이며 언문 글을 번역한 이는 채수· 이창신· 정성근이었습니다. 그리고 임인년 8월 16일 사약을 내릴 때 승지는 노공필· 이세좌· 성준· 김세적· 강자평· 권건이요, 주서는 이승건 ·권주이고, 사관은 신복의·홍계원이며, 언문을 펴 읽은 이는 내관 안중경, 언문을 풀어 보인 것은 강자평 이었습니다” 라고 하니, 전교하기를,“ 정승 등은 그죄를 의논하여 아뢰라” 하였다.

 

갑자년 사화의 불길이 온 사방으로 번지면서 숱한 인물들이죽음으로 내몰렸고, 허백정과 친하였던 인물들도 화를 당하게 되었다. 허백정에 대한 연산군의 분노 또한 더욱 깊어져, 그가 지은 단오첩자판 마저 뜯겨지고 그의 아들들은 줄줄이 땅 밖 거제도로유뱃길에 올랐으며 화는 마침내 그에게까지 미치게 된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 윤 4월 28일

교서관校書館에서 단오첩자端午帖子를 새겨 들이니, 전교하기를, “홍귀달은 몸이 불경죄를 범하였으니, 그가 지은 첩자판을 깎아내고 글 잘 짓는 사람으로 하여금 다시 짓게 하라”하였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 5월 27일

전교하기를, “홍귀달의 아들 홍언충洪彦忠을 외방으로 내보내라” 하였다.

 

실록에는 여기에 이어 6월 16일조에 별다른 기록 없이 이전에 있었던 일만 간단히 적은 뒤 허백정에게 교형絞刑을 내렸다는 사실과 졸기卒記를 달아 놓았다. 실은 그가 단천에서 교형을 당한일자는 6월 22일이다. 아마도 6월 16일은 조정에서 교형을 확정한 일자라고 생각된다. 졸기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 6월 16일, 전 이조판서 홍귀달의 졸기 귀달은 한미한 신분에서 일어나 힘써 배워서 급제하여, 벼슬이 재상에 이르렀다. 성품이 평탄하고 너그러워 평생에 남을 거스르는 빛을 가진 적이 없고 남이 자기를 헐뜯음을 들어도 성내지 않았으니, 그의 아량에 감복하는 사람이 많았다. 문장에 있어서는 곱고도 굳세고 법도가 있었으며, 서사敍事를 더욱 잘하여 한때의 비명碑銘·묘지墓誌가 다 그의 손에서 나왔다. 그 정자에 편액하기를 허백虛白이라 하고 날마다 서사書史를스스로 즐겼다. 시정時政이 날로 거칠어지매 여러 번 경연에서 옛일에 따라 간언을 진술하니, 이로 말미암아 뜻을 거스르더니 경기감사로 좌천되기에 이르렀다. 그때 왕이 바야흐로 장녹수張綠水를 꼬이는데, 경영京營의 고지기가 되고자 하는 어떤 사람이 녹수를 인연하여 왕에게 청하매 왕이 몰래 신수근을 시켜서 자기 뜻을 부탁하였으나 귀달이 듣지 않았다. 이로 인해 왕이 언짢아하여 어떤 일을 빌미로 외방으로 귀양 보냈다가 이에 이르러 죽이니, 사람들이 다 그 허물없이 당함을 슬퍼하였다.

 

졸기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내용이 어떻게 된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허백정의 신도비문 에서는 그가 경원으로 유배를 떠나면서 가족들에게“나는 함창의 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벼슬이 재상의 지위에까지 이르렀으니, 성공한 것도 나로부터이고 실패한 것도 나로부터이다. 또한 다시 무엇을 한스럽게 여기겠는가?”라고 담담히 말했다고 전한다. 이로 볼 때 그는 이미 죽음을 각오하였던 것 같다.

 

시문 속에 나타난 ‘허백’한 삶 홍귀달의 호‘허백정’은『장자莊子』「인간세人間世」의“허실생백虛室生白”, 곧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방에 눈부신 햇빛이 비쳐 환히 밝다” 라는 말에서 따온 듯하다. 그의 또 다른 호인 ‘함허정涵虛亭’도‘ 허’자를 쓰고 있다. 일생을 바삐 40년 넘도록 관료로서 보냈지만 그의 마음은 늘 ‘허백’을 그리고 있었는지 모른다. 실제로 그의 삶 또한 그러했다. 그는 40여 년 동안 관직생활을 하였지만 서울이든 고향이든 후손에게 물려줄 집 하나 제대로 장만하지 못하였다. 높은 자리에 있다 보면 온갖 소리며 애꿎은 모함을 다 받게 마련인데, 허백정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실록이나 서책 속 문자에 매달리고 몇 자 사필史筆에만 이끌려 이러쿵저러쿵 말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을 것이다. 이것은 사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다간 사람을 바라볼 때 더욱 조심할 점이다. 그가 ‘허백’한 삶을 살다간 모습은 ‘허백정’과‘ 귀달마’의 일화가 잘 전해 주고 있다. 말이 나왔으니 그 일화를 잠깐 소개하고 넘어가기로 하자. 허백정이 42세(1479, 성종 10) 때 남산 아래 청학동 부근에다 띳집 한 칸을 마련하여 ‘허백’이란 당호를 걸고서 지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팔도에 그가 999칸 화려한 기와집을 짓고 산다는 소문이 퍼져서 과거보러 오는 사람들이 구경을 하고자 구럼처럼 몰려들었다는 일화이다. 집은 비록 한 칸이지만 999칸의 사색을 하고도 남음이 있다는 말이 와전되어 그렇게 된 듯하지만, 그를 둘러싼 소문에는 그에 대한 애꿎은 모함도 한 몫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유원이 지은『임하필기林下筆記』의「춘명일사春明逸史」에는 다음과 같은 ‘귀달마’ 일화가 전하고 있다.

 

홍귀달의 말(馬)이 노둔했던 일 문광공文匡公홍귀달은 지위가 삼관三館에 이르렀는데도 성품이 매우 검박하여 타는 말마다 관단마款段馬(걸음이 느린 조랑말)였다. 길 가는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며 ‘귀달마貴達馬’라 하였으니, 대체로 이는 그의 인품을 흠모하면서 그의 말이 보잘것 없음을 비웃은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방언이 되어 노둔한말뿐만 아니라 모든 노둔한 사물들을 또한 ‘귀달’이라 칭하였다. 그 후손들이 연유를 알지 못한 채 대중을 따라 똑같이 일컬으니 우스운 일이다.

 

그러면 이제 그의 시문도 감상할 겸 시를 통해 그의 ‘허백’한 삶을 한 번 되돌아보기로 하자. 허백정에게서 가장 화려하고 행복했던 날은 젊은 시절 성종의 총애를 받으며 곁에서 보필하던 때였던 것 같다. 그는 외지에 멀리 나와 있으면서 도승지 조위에게 시 한 수를 보내 좋았던 지난날을 그리워하고 있다.

 

대궐 한가운데 은대 높으니 일찍이 우둔했던 나 빼어난 인물들 뒤쫓던 기억이 나네. 임금의 은택 매일 비와 이슬같이 내리고 봉지에는 따뜻한 봄 물결 일렁인다. 옥 술잔 속 찰랑이는 그림자 신선의 이슬이요 은쟁반 위 빛깔 도드라진 것 붉은 앵두로다. 이제 고개 돌려 저 멀리 안개 너머로 손들어 흔들며 조신선께 인사하노라.

金闕正中銀臺高憶曾駑劣隨英豪

天家恩澤日雨露鳳池漲暖春波濤

玉影搖紫霞液銀盤色凸紅櫻桃

而今回首隔塵霧擧手遙禮神仙曺

 

앞에서 말한 대로 허백정은 42세 때 남산 아래 허백정을 지어 살았다. 이때도 행복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미 그에게는 지위와 명예가 있어 그의 귀에는 온갖 소리가 다 들려왔던 모양이다. 애써 정자의 당호처럼 ‘허백’하게 살려는 모습이 역력하다. 「정하남공鄭河南公과 함께 밤에 모정茅亭에서 술을 마시다 조금 취하여 헤어졌다. 아침에 혼자 앉았다 느낌이 일어나 시를 지어 하남공에게 보내다」와「감회, 희윤希尹에게 줌」2수를 옮겨 본다.

 

남산의 푸른 빛 내 사는 집 뒤덮고

새로 지은 띠풀 정자는 저잣거리 굽어보네.

멋진 벗 만나니 오랜 난초 향기인 듯

좋은 계절이 오니 국화 피기 시작하네.

인생살이 소란스레 모였다 흩어졌다

세상사 어지러이 비난했다 칭찬했다.

뒷날 밤에 다시 만나 한잔해야 하거니

푸른 하늘에 달 뜰 때 날 버려두지 마시길.

南山蒼翠壓吾廬新作茅亭俯市閭

勝友正逢蘭臭舊佳辰又屬菊花初

人生擾擾聚還散世事紛紛毁復譽

後夜便須相對飮靑天有月不孤余

내 사는 곳은 남산이고 그대는 북쪽에 살지만

보노라면 하는 일마다 절로 서로 같도다.

비록 집은 누추해도 마음은 얽매이지 않고

쌀 주머니는 비었어도 집에는 책이 있다네.

해 비치는 세상바닥에 잘난 사람들 놀라게 하지만

벼슬살이 험한 바다에 바람 일어도 다행히 배가 비었구나.

이름 얻는 곳 비방도 많이 따르는 법

다시 술 한 잔 가득 들며 비방과 칭찬일랑 맡기련다.

我住南山君北居看來事事自相如

縱然屋陋心無累正使囊空家有書

日照市門驚虎嘯風生宦海幸舟虛

從來得謗收名處且進深杯任毁譽

 

허백정은 44세(1481, 성종 12) 때 황태자의 천추절 진하사가 되어 서장관 신종호와 함께 사행길에 오른다. 이때 그는 50여 수의시를 남겼다. 그는 시 속에다 이국적인 풍광과 여로의 어려움, 고향에 대한 정 등을 담아내고 있다. 그 중「반산역盤山驛에서 제함」이라는 시 한 수를 가려 본다.

 

산은 무려에 이르러 푸른빛이 끝나려 하는데

광녕에서 동쪽을 바라보매 길은 멀고 아득하여라.

진흙 길 여윈 말이 어찌 고통 견디랴

작은 역 하나뿐인 평상에서 잠깐 쉬기를 청한다.

밤중의 고각 소리는 손을 놀라 깨우고

창 밖 달빛은 객수에 젖은 마음을 차게 비춘다.

닭이 울면 또 고평을 향해 떠나리니

거기는 구름이 짙어 길이 더욱 어렵다는 말을 들었다.

山到無閭靑欲了廣寧東望路漫漫

泥途瘦馬那堪苦小驛孤牀借安

半夜角聲吹客起一窓月色照愁寒

鳴又向高平去見說雲深路更難

 

허백정은 힘든 사행길 속에서도 들판에 흩어져 있는 무덤들을 바라보며 인생의 무상감에 젖는다. 그도 이미 인생의 반을 넘어 살았으니 인생사 허무함을 느끼기에는 충분하였으리라.

 

드넓은 들판 가운데로 길은 나 있고 野曠中有露

하늘은 맑아 사방 구름 한 점 없다. 天晴四無雲

소란스레 길 가는 사람들 擾擾路中人

첩첩이 늘어선 들판의 무덤들. 原上墳

백년이면 다 죽고 말 터인데 百年會有盡

만사는 바쁘기만 하다. 萬事徒紛紛

모름지기 붉은 치마에 취해서 要須醉紅裙

즐겁게 청춘을 보내야 하리. 得得過靑春

그대는 보았는가 들판의 무덤들을 君看原上墳

이 모두 한땐 길 가던 사람이었다네. 盡是路中人

 

인생사 허무함은 돌아오던 길, 의주에서 새삼 느끼게 된다. 바로 거기에서 모친 상산김씨가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그는 비보를 듣고 비통한 심정으로 고향 땅 함창 율곡으로 달려갔다. 끝내 그는 일흔이 다 된 늘그막에 귀양길에 오른다. 귀양 떠나는 길 작은 곡구역谷口驛에서 하룻밤 묵으며 지은 시 1수와 귀양지 경원에서 평사評事이장곤李長坤에게 보낸 시 1수를 골라 보았다.

 

길게 뻗은 길 해안을 따라 나 있고 長途緣海岸

조그만 역은 산 뿌리 곁에 붙어 있다. 小驛傍山根

새들은 구름 속을 날고 鳥道雲逈

고래는 물결 일으켜 해를 씻는다. 鯨波日飜

이곳 사는 사람들 정이 많건만 居人多厚意

귀양 가는 나그네 절로 마음 아프다. 謫客自傷魂

내일 아침 큰 재를 넘고 나면 大嶺明朝過

다시는 내 고향 들 바라볼 수 없으리. 無因望故園

쇠약하고 늙은데 병 또한 많고 衰白仍多病

떠밀려 온 곳 변경 중에 변경이다. 流離更極邊

몸 둔 곳은 도깨비굴이요 投身魅窟

멀리 바라보면 오랑캐의 하늘이다. 極目犬羊天

삭막하여 밤에도 잠 못 이루고 索寞夜無寐

세월 가는 것 하루가 한 해 같다. 經過日似年

시 짓기도 그만두고 술마저 끊으니 廢詩還止酒

할 일 없어 몸은 도리어 편안하다. 無事却身便

 

노구의 허백정은 홀로 유배지에서 아내의 죽음 소식과 아들들이 줄줄이 거제도로 유배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며, 평생을 벗해온 시 짓는 것도 접고 술마저 끊은 채 허허롭게 삶의 마감을 기다리고 있다.

 

★ 교유한 인물들과 제자 농암 이현보

 

허백정 홍귀달은 그의 말처럼 영남의 한미한 집안 출신으로40여 년 관직생활을 하면서 비교적 원만한 인간관계를 맺어 온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그를‘사림파’에서 빼거나 심지어‘훈구파’에 포함시켜 버리는 것은 무리가 있다. 관료생활의 길고 짧음과 높고 낮음을 가지고 그렇게 판정해서는 안 될 것이며, 무오사화에서 크게 화를 입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렇게 판정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가 무오사화에 크게 연루되지 않은 것은 굳이 말하면 연산군의 총애가 아직은 남아 있었고 그야말로 행운이었을 뿐, 그는 피화의 직접적 당사자인 김종직 및 그의 제자들과 함께 친밀한 유대를 맺고 ‘우리 당’(吾黨)이라는 의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또한 결국은 연이은 직간으로 연산군의 눈 밖에 나게 되어 갑자년에는 화를 당하였던 것이다. 허백정은 김종직과 7살 차이로, 세조 때 그보다 2년 늦게 문과 급제를 하여 1489년 김종직이 병으로 사임하여 고향 밀양으로 물러날 때까지 함께 조정에 섰다. 당시는 영남 출신들이 중앙관계에 하나둘씩 진출하기 시작하던 때로서 그 수가 많지 않았으며, 상주 함창과 김종직의 선향인 선산이 바로 이웃이어서 친밀감은 더욱 컸다. 그랬기에 나이 차이가 적지 않았음에도 허백정은 그의 제자들과도 격의 없이 지낼 수 있었다. 특히 두 사람은 시문으로도 일세를 풍미하였던 터라, 주고받은 시로써 둘 간의 벗 사귐을 한번 들여다볼까 한다. 먼저 허사악이란 이가 허백정에게 주려고 선천에서 좋은 돌벼루를 구해 왔는데, 마침 김종직이 사악의 집에 들렀다가 그만 가로챈 뒤 미안한 마음에 그에게 시 한 수를 보낸 것이 있다.

 

선성의 자주색 벼루는 동방의 기물이라 宣城紫硯東方奇

바람 물결 머금은 녹석보다 훨씬 낫다오. 大勝綠石含風

문방에 하루라도 없어서는 안 되거니와 文房不可一日無

옥의 덕과 쇠의 소리를 내가 본받는 바로세. 玉德金聲我所師

허군이 이걸 얻어 겹겹이 싸가지고 와서 許君得之十襲來

그대에게 주려 했으나 그대는 몰랐었지. 持欲贈君君不知

내가 어저께 허군의 집을 찾았다가 我昨剝啄叩其門

이 벼루를 보고 마음이 갑자기 기뻐졌네. 此益友神忽怡

웃고 농하는 틈을 타서 품안에 넣었더니 輒因笑謔入懷抱

허군이 꾸짖었지만 어찌 돌볼 겨를 있으랴. 許君怒胡恤之

집에 돌아와 조용히 붓통 곁에 놓아두니 還家靜置筆格傍

붉은 못에 검은 구름이 드리운 듯하구려. 紫潭疑有玄雲垂

문 닫고 앉아 충어를 주내기에 알맞으니 正當閉戶註蟲魚

벽돌이나 기와 조각을 곁에 두지 말아야지. 斷塼片瓦休相隨

연석을 바치어 사죄에 갈음하노니 爲投燕石代肉袒

후일의 벌주야 어찌 감히 사양하리오. 他日罰籌安敢辭

 

약간의 장난기와 함께 둘 간의 깊은 우정이 엿보인다. 또 김종직은 허백정에게 “젊은 시절 박한 녹봉 좇으며 오얏나무 아래지름길을 밟지 않았으니, 의기가 통하는 든든한 벗을 얻고서는 가난이 병 아님을 함께 기뻐했네” 라는 시를 보내어 도우로서의 정을 내보이기도 하였다. 한편 허백정은 호남관찰사로 나가는 그를 전송하며 다음과 같이 당부한다.

 

다스리기 어려운 곳 후백제 땅이라 했었거니 難治稱後濟

전해오는 풍습은 견훤에게서 시작되었지. 流俗自甄萱

땅 넓어 농사일에 힘쓰고 地廣農桑務

백성들 많아 송사가 빈번하다네. 人稠獄訟繁

변방 고을에서는 자주 변고를 알리고 邊郡頻報變

조졸들은 걸핏하면 원망을 할 것일세. 漕卒輒申

묻노니, 그대 어떻게 다스리려나 借問君何以

나 방촌의 마음 간직하시란 말 전한다네. 自言方寸存

 

1492년 김종직이 세상을 뜨고 2년 뒤, 홍문관대제학으로 있던 허백정은 동향 선배이자 도우였던 그의 신도비문을 쓰면서“공은 명성과 실상이 많은지라, 이것이 묻히도록 둘 수 없어 이제 붓을 잡고 기록하노라”라는 명문銘文과 함께 다음과 같이 적었다.

 

덕행, 문장, 정사는 공문孔門의 고제高弟로서도 겸한 이가 있지않았으니, 더구나 그 밖의 사람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재주가 우수한 사람은 행실에 결점이 있고, 성품이 소박한 사람은 다스림에 서툰 것이 바로 일반적인 모습이다. 그런데 우리문간공文簡公같은 이는 그렇지 않았다. 행실은 남의 표본이되고 학문은 남의 스승이 되었으며, 생존 시에는 임금께서 후히 대우하였고 작고한 뒤에는 뭇 사람들이 슬퍼하며 사모하였으니, 어쩌면 공의 한 몸이 경중輕重에 그토록 관계될 수 있었단 말인가.

 

조위曺偉(1454~1503)는 자가 태허太虛, 호가 매계梅溪로, 김종직의 제자이자 처남이다. 그는 1475년 문과에 급제한 뒤 도승지와 호조참판, 충청도관찰사, 대사성 등을 지냈다. 1495년(연산군 1) 지춘추관사로『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김일손이 사초로 올린 김종직의「조의제문」을 그대로 실은 죄로 무오사화 때 가까스로 죽임을 면한 채 유배살이 하던 중 순천에서 죽었다. 허백정은 16살이나 어린 그를 도우이자 외우畏友로서 대했다. 그가 도승지로 있을때 허백정이 보낸 시를 우리는 이미 앞에서 보았다. 충청도관찰사로 있을 때에도 허백정은 그를 찾은 뒤 시 한 수를 남겼다.

 

손과 주인으로 만난 호서의 길 賓主西湖路

맑은 서리 내리는 구월의 하늘. 淸霜九月天

말은 붉게 물든 숲 밖으로 떠나고 馬行紅樹外

기러기는 흰 구름 가로 멀어지네. 雁落白雲邊

주고받은 시는 모두 너무나 좋았고 唱和詩皆好

서로 나눈 얘기들은 아주 편안했었지. 商論事盡便

노랫가락이 온 땅 가득 울려 퍼지니 歌謠應滿地

신선을 취하게 해도 해되지 않으리. 不害醉神仙

 

시제詩題를 보면 이 자리에는 도사都事김일손도 함께 있었던 모양이다. 허백정은 유배살이 중 세상을 뜬 어린 도우 조위를 슬퍼하며 만사와 묘지명을 지었다. 그는 묘지명에서“아들도 없고 딸도 없거늘 누가 상주 노릇할까, 장사는 아우가 맡고 부조는 친구가 맡았네. 묘지는 내가 짓노니 천추만세에 전하기를, 높은 절벽 깊은 골짜기에 맑은 향기 그치지 않네”라며 깊이 애도하였다. 김일손金馹孫(1464~1498)은 자가 계운季雲, 호가 탁영濯纓이며,23세 때인 1486년 문과 급제를 한 뒤 장령과 정언, 이조 좌랑과 정랑을 두루 거쳤으며, 질정관으로 있을 때 명나라 사행을 다녀오면서 정유鄭愈의『소집설小學集說』을 가져와 우리나라에 전파하였다. 그는『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춘추관기사관으로 있으면서 스승 김종직의「조의제문」을 사초에 포함시킨 죄로 1498년 무오사화 때 능지처참 되었다. 허백정은 자신보다 26세나 어린 그와 친교를 맺고「사암기思庵記」를 지어 주었으며, 그의 부친 김맹金孟의 묘지명도 지어 주었다. 여기에서 그는 김일손에게 ‘우리당’(吾黨)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이를 빈말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분명 김종직과 조위, 김일손 등을 ‘우리 당’으로 생각하였으며, 그들 또한 그를 그렇게 받아들인 것이 분명하다.

 

허백정은 제자가 많지 않았다. 그 이유는 김종직의 경우 주로 그가 함양과 선산 등에서 지방관을 지낼 때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유호인兪好仁, 김일손 같은 걸출한 제자들이 문하에 든것과 비교해 보면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대부분 중앙관직에 있었으며, 지방관으로 나갈 때도 관찰사 같은 직책을 수행하였기에 문하에 제자를 두기가 쉽지 않았다. 대신 그는 도우 김종직의 제자들을 자신의 제자처럼, 또한 도우처럼 여겼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가운데 농암 이현보는 바로 그의 직접적인 제자였다. 이현보李賢輔(1467~1555)는 호가 농암聾巖이며, 안동 예안 출신이다. 그는 20세 때 허백정 문하에 나아갔다. 1498년(연산군 4) 문과에 급제한 뒤 교서관, 검열 등을 지냈으며, 1504년 정언으로 있을 때 서연관의 비리를 공박하다가 안동으로 유배되었다. 중종반정 뒤 안동부사, 경상도관찰사 등의 지방관을 지냈으며, 관직이 호조판서에까지 이르렀다. 1542년 지중추부사가 제수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사양하고 고향으로 내려와서 시를 짓고 자연과 벗하며 여생을 마쳤다. 퇴계退溪이황李滉(1501~1570)과는 이웃해 살면서 가깝게 지냈다. 그는 특히「어부가漁父歌」를 지어 우리나라의 강호문학江湖文學을연 인물로 유명한데, 그의 시조「효빈가」와「농암가」,「 생일가」등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 중「농암가」를 옮겨 본다.

 

농암에 올라보니 노안老眼이 유명猶明이로다인사人事가 변한들 산천이야 가실까 암전岩前에 모수某水모구某丘가 어제 본 듯하여라.

 

또한 그는 70세의 나이에 늙은 부모를 위해 색동옷을 입고춤을 춘 일화로도 유명하다. 그의 효성스런 모습은 집의 당호를 ‘애일당愛日堂’이라고 붙인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일日’은 곧 부모님을 가리킨다. 이것은 그의 스승 허백정이 부친의 시묘살이를 하면서 당호를 ‘애경당愛敬堂’ 이라 붙인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와 허백정의 후손들이 세교를 이어갔음은 허백정의 아들 홍언국洪彦國이 애일당에 대한 차운시를 남긴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허백정의 시문은 제자 농암 이현보에게로 전해졌으며, 다시 이것은 이황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겠다.

 

★ 虛白亭의 아들들

 

허백정 홍귀달은 언필彦弼, 언승彦昇, 언방彦邦, 언충彦忠, 언국彦國다섯 아들을 두었다. 이 중 맏이인 언필은 일찍 죽고 언방과 언충이 대과 급제를 하여 관직에 나아갔으며, 언승은 진사로 거창현감을 지냈고, 언국도 진사로서 관직을 제수 받았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이 네 아들들은 또한 부친 허백정의 사건에 연루되어 모두 거제도로 유배되기도 하였다. 네 아들 중 우암 홍언충은 별도로 살펴보기로 하고 먼저 세 아들의 행적을 살펴본다.

 

홍언승의 행적은 노주蘆洲 김태일金兌一이 찬한「거창공묘갈명巨昌公墓碣銘」에 그 대략을 전하고 있다. 그의 생졸년은 미상이며, 자는 대요大曜이다. 1495년에 진사가 되어 선공봉사를 지내다가 부친의 사건에 연루되어 거제도에 유배를 갔으며, 중종반정으로 유배에서 풀려난 뒤 거창현감 등을 지냈다. 배는 경주이씨 진사 취수헌醉睡軒겸謙의 딸이며, 묘소는 함창 서쪽 검부리에 있다. 그는 복명復明과 복창復昌두 아들과 딸 둘을 두었는데, 장녀는 판서 오준吳準에게, 차녀는 정랑 준암樽巖 이약빙李若氷에게 출가하였다. 사위 이약빙은 본관이 광주廣州이고 충주 사람으로 1513년에 문과 급제를 하였다. 그가 이조정랑에 있을 때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죽음에 이르자 형 이약수李若水가 동료 유생 150여 명을 이끌고 조광조의 신원을 호소하다 옥에 갇혔는데, 이약빙이 또한 조광조와 이약수의 사면을 청하다 파직되었다. 그 뒤 복직되어 예조정랑을 거쳐 한산군수가 되었는데, 1539년 연산군과 노산군魯山君(단종)의 후사를 세울 것 등을 청하다 투옥된 후 고향인 충주로 물러났다. 다시 1547년(명종 2)사복시정에 있던 중 소윤小尹일파인 윤원형, 이기 등이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을 빌미로 윤임尹任등의 대윤大尹일파를 제거할 때 인척으로 몰려 죽었다. 그는 바로 윤임과 사돈 간이었다. 이때 그의 처남이었던 홍언승의 두 아들 복명과 복창도 혈손을 두지 못한 채 역시 인척으로 몰려 함께 죽었다. 이렇게 됨으로써 허백정의 가계계승은 다시 그 다음 아들들에게로 넘어가 복잡한 모습을 보이게 된다.

 

홍언방(1470~1526)의 행적은 질서인 준암 이약빙이 찬한「홍문박사공묘갈명弘文博士公墓碣銘」에 그 대략이 전한다. 그는 자가군미君美이고, 1502년에 대과 급제를 하여 상서부직장 등을 지내다 1504년 부친의 사건에 연루되어 거제도로 유배를 떠났으며, 중종반정 후 유배에서 풀려 홍문관박사, 단성과 동복 현감, 언양군수 등을 지냈다. 낙향 후 5년 가량 지내다 1526년 전적의 직이 내려 한양으로 가던 중 향년 57세로 병사하였다. 배는 감천문씨甘泉文氏이고, 묘소는 영순 율곡에 있다.

그는 완琬과 개, 두 아들과 딸 한 명을 두었는데, 딸은 참판 권주權柱의 아들 석潟에게 출가하였다. 그리고 완은 아들이 없어 종질인 언국의 손자이자 경삼景參의 둘째 아들인 덕희德禧가 뒤를 이었다. 이러한 연유로 허백정의 가통은 언방이 아닌 언국으로 넘어가서 경삼, 덕록德祿, 호鎬, 여하汝河로 이어지게 된 것 같다. 당시 사람들은“문광공의 여경餘慶이 공(언방)과 우암(언충)에 이르러 드러났도다” 라고 말할 정도였으나, 유배에서 풀려난 뒤에도 홍언방의 관직생활은 크게 순탄하지 않았던 듯하다. 그는 관직을 제수 받을 때마다 인륜강상을 어겼다는 잘못을 들어 탄핵받곤 하였으며, 끝내 이 무고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여 크게 현달하지 못하였다. 그가 문재에 뛰어났음은 채수蔡壽의 신도비문을 지은 것에서 짐작할 수 있다. 홍언승과 언방, 언충, 언국 형제들은 이행李荇과 평생 동안도우로서 지냈으며, 1504년 이후로 모두 함께 거제도에 유배를 가 있던 때도 있었다. 유배지에서도 그들이 서로 몰래 만나 친교를 가졌던 것으로 보이는 연시聯詩가 있어 여기에 옮겨 본다. 이시는『용재집』속「해도록海島錄」에 실려 있다. 이 시는 “제군과함께 구천九川장에 놀러 갔다가 연시를 작은 돌에 적어 바위 구멍에 감추어 두다”라는 제가 달려 있어 당시 정황을 잘 알 수 있다.

 

맑은 시냇가에 가파른 벼랑 (彦邦) 危壁淸溪上

오늘 아침 나란히 말 타고 보노라 (荇) 玆晨竝馬看

푸른 이끼는 고금의 빛이건만 (世弼) 蒼苔今古色

사람의 일은 성쇠가 바뀌누나 (彦昇) 人事盛衰端

빗방울 떨어져 시 짓길 재촉하고 ( ) 雨點催詩急

술잔 속은 느긋한 흥을 이끌도다 (彦邦) 杯心引興寬

작은 시편으로 성명을 남기노니 (荇) 小篇留姓字

모쪼록 우두일랑 범하지 말라 (世弼) 牛斗莫相干

 

마지막 “우두일랑 범하지 말라” 라는 구절의‘우두’는 견우성과 북두성을 가리킨다. 오나라 때 북두성과 견우성 사이에 늘 보랏빛 기운이 감돌기에 장화張華가 점성술가 뇌환에게 물었더니 보검의 빛이라 하였는데, 정말 풍성의 땅속에서 용천龍泉과 태아太阿두 보검을 발견했다는 고사가『진서晋書』의「장화열전張華列傳」에 실려 있다. 자기들의 연시가 바위틈에 잘 숨겨져 있어야지 용천과 태아의 두 보검처럼 세상에 알려지면 안 된다는 뜻이다. 이행은 허백정의 아들들과 두루 친교를 가졌던 인물로 뒷날 홍언방의 부고를 듣고서 애끓는 정을 표현하였다.

 

직경의 무덤가 나무 벌써 굵어졌고 直卿宰木曾成拱

대요의 산 정자는 빈 지가 이미 오래인데, 大曜山亭久已虛

백발의 몸으로 또 군미의 부고 들으니 白首又聞君美訃

옛 친구인 내 심정이 과연 어떠하겠소. 故人情緖果何如

지금부터 어언 이십 년 전인 갑자년 당시 甲子今垂二紀餘

사람이 경도하여 함허를 우러러보았지. 士林傾倒仰涵虛

그 모습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데 典刑從此還無托

서글피 보니 저 정자는 무심히 서 있구나. 望名亭只自如

일신에 얽힌 구설 여지가 없었으니 一身多口不遺餘

전원으로 돌아오매 만사가 속절없었지. 却掃田園萬事虛

오늘 다시 빈관에서 초혼 소리 들으니 今日還聞賓館復

인생 백 년 기구하기 그대 같은 이 없구려. 百年屯蹇莫君如

우리가 헤어진 지도 어언 십 년 넘어 乖離今已十年餘

멀리서 서로가 꿈속에서나 만났었지. 契闊還成一夢虛

반평생을 우환 속에 서로 사귀었으나 半歲相從憂患裏

평생에 우정이야 그 누가 이만하리요. 平生交道有誰如

 

이 시 역시『용재집』속에 실려 있는데, 이행은 평생 도우였던 홍언방의 부고를 듣고 곡을 하면서 직경(언충)과 대요(언승), 그리고 그들의 부친인 함허(허백정)에 대한 옛 기억과 정을 함께 떠올리고 있다.

 

홍언국(1475~1530)은 자가 공좌公佐, 호가 눌암訥菴이며, 5대손상민相民이 쓴「눌암공묘갈명訥菴公墓碣銘」에서 그의 행적을 살펴볼 수 있다. 그는 20세 때 성균진사가 된 이후 재랑의 관직이 내렸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1504년 연산군이 그의 딸을 궁궐에 들이라고 한 명을 거역하고 부친 허백정을 통해 죄을 면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곽산에 유배되었으며, 다시 거제도로 유배되었다. 그는 당시의 참혹했던 상황을 상소문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전 참봉 홍언국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러하였다.“신의 아비 좌찬성 홍귀달은 세조조에 급제하고 성묘조成廟朝에 벼슬하면서 특별히 비상한 은총을 입어 대간·시종이 되기20여 년에, 알면 말하지 않음이 없고 말하면 들어 주지 않음이 없었으매 성종은 충직하다고 인정하시었습니다. 임자년 봄에 또 대제학을 삼아 대우가 더욱 융숭하니, 충심으로 더욱 감격하여 정성을 다하려고 생각하였습니다. 폐주廢主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자 한결같이 성종을 섬기던 그대로 섬기며 생각하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말을 하고 허물이 있으면 반드시 간하니, 폐주가 그 곧은 말을 매우 꺼렸습니다. 그러다가 갑자년 3월에 와서는 허물이 아닌 것을 가지고 얽어 큰 죄를 만들어서, 형장을 때려 서울에서 2천여 리나 되는 함경도 경원부로 유배하고 신을 평안도 곽산군으로 유배하였습니다. 신의 어미는 이 일 때문에 근심하고 놀라 병을 얻어 그해4월 서울에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6월에 또 신의 아비를 경옥京獄으로 잡아 오다가 단천 도상에서 사사賜死하였습니다. 석달여 만에 부모가 다 제명에 죽지 못하니 한 집안의 화는 참혹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이 스스로 죽지 못하고 구차하게 목숨을 이어 왔는데, 을축년 정월에 또 신을 의금부에 잡아 가두었다가 4월에 해상 거제현으로 이배하여 종을 삼았으며, 8월에또 의금부로 잡아 왔다가 병인년 2월에 거제 구금장拘禁場으로도로 귀양 보내니, 곤고하고 참독慘毒한 상황는 형용하여 말하기 어렵습니다. 폐주 말년에는 주륙誅戮이 더욱 심하므로 신은해상에 찬축竄逐되어 있는 곳에서 밤낮으로 죽기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중종실록』, 1510년 1월 20일

 

그는 중종반정으로 유배에서 풀려난 뒤에도 형 언방과 함께 인륜강상을 어겼다는 무고로 숱한 고역을 겪어야만 했다. 이런 연유로 그는 문과 응시를 끝내 포기하고 고향산림에 묻혀 유유자적하는 가운데 기울어진 가세를 부여잡는 데 진력하였다. 부친 허백정의 신도비를 세우기 위해 대제학 남곤南袞으로부터 비문을 받고 손수 글씨를 썼으며, 중형 우암공 언충의 묘갈명을 지었고, 허백정의 제자 농암聾巖이현보李賢輔의 집안과 세교를 이어갔다. 그는 위패에 관직을 쓰지 말라는 유명을 남긴 채 향년 56세로세상을 떴다. 배는 동래정씨와 상산김씨이며, 그의 묘소는 동래정씨와 함께 영순 율리에 있다. 그는 아들 경삼景參을 두었고 경삼은 사정을 지낸 덕록德祿과 사과를 지낸 덕희德禧를 두었는데,

차남 덕희는 종숙인 완琬에게로 출양하고 맏이인 덕록이 허백정의 가통을 이어갔다.

 

계명대학교 교수 홍원식

리스트

군위군 대동화수회
천년마을 한밤마을
  • 대보사
  • 국립민속박물관
  • 문화재청
  • 한국국학진흥원
  • 성균관
  • 문화체육관광부

홈페이지에 게시된 이메일 주소가 자동수집되는것을 거부하며 이를 위반시 정보통신망법에 의해 처벌됨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