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친사업체
긍지로 남아있는 선조들의 행적



대구에서 교육을 받은 나의 학창시절에는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같은 학급친구들 가운데 부림홍씨가 섞여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고 이 때문에 홍씨 존재감이 미미한 것 처럼 느꼈었다. 제사 때나 집안 모임이 있을 때는 훌륭한 선조들의 업적을 말씀해 주셨고 경북도내의 전통마을에서 우리 부림홍가를 상당하게 높이 평가한다는 사실을 듣기도 했지만 학교생활에서는 그러질 못했다. 시조이신 난(鸞)자 선조께서 처음 부림홍씨란 성을 나라로부터 하사받은 시기가 고려중엽으로 기록된 사실에서 보면 지금까지 부림홍씨의 역사는 약1천년이 흘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 오랜세월 인구는 약2만명에 불과하다는 것이 우리성씨에 대한 존재감의 회의를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본관이 다른 여러 홍씨들이 있지만 우리 부림홍문은 선조들의 행장이나 유적 유물을 접하고 내력을 듣는 기회가 인구비 만큼 적을 수 밖에 없었던것 같다.

그러던 것이 20세 무렵인 1963년 고교동기인 안동 와룡출신 진성이씨(이재등)친구와 함께 서울서 대구로 오다가 예안 하계에서 당시 영남의 거유 이동흠선생을 만난 것이 나의 뿌리를 몸으로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그 당시 중앙선 열차에서 친구의 소개로 알게된 같은 또래의 하계출신 진성이씨 친구(이부)를 만나 그의 조부이신 선생을 찾아 뵙고 인사를 드리게 된 것이다. 이동흠선생은 할아버지되시는 이만도선생이 경술국치로 나라가 망하자 단식순국하셨고 선생의 아버지 이중업선생은 파리장서사건으로 옥고를 치루었다. 선생은 동생이신 종흠선생과 함께 2차유림단사건으로 옥고를 치룬 순국독립운동3대 집안출신이며 진성이씨 집안의 대표적 인물이셨다.,선생에게 큰절로 인사를 올리자 본관을 물었고 ‘부림홍가’라고 하자 일제 당시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고문 끝에 돌아가신 재종조부인신 묵(默)자 할아버지에 대해 물어셨다. 집안의 손자라고 하자 “네가 우리집과 너희집의 세교를 잇는구나”하시면서 동내 청년들을 불러 잔치를 베풀어주셨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집안 제사때나 한번씩 들었을 뿐 얼굴도 모르던 할아버지가 이렇게 대단한 어르신들과 친구였고 함께 독립운동을 하셨던 실감나는 추억담을 들으면서 청년인 나의 가슴에도 큰 자부심이 벅차올랐다. 동생인 종흠선생은 나와 이름자가 같다면서 특별히 사랑을 주셨던 것을 잊을 수 없다. 종흠선생은 척서정 편액글씨를 당신이 쓰셨다고 하시면서 한밤에 오셨던 이야기도 들려주셨다.

그 뒤 1991년, 내가 근무하던 매일신문사의 북부본부장 발령을 받고 안동에서 만1년간 지내면서 또 한번 직접 우리의 뿌리에 대해 확인할 기회를 가졌다. 부임인사차 안동지역의 각기관과 종손들을 방문했는데 영천이씨 농암종가의 당시 종손이신 고 이용구선생을 찾아 뵙고 인사를 드렸을 때였다. 선생은 그 무렵 연세가 80이 훨씬 넘었지만 학처럼 고고한 모습으로 안동대학 한문학과 교수들을 상대로 강의를 하실 만큼 큰 한학자이었고 지역의 주요 행사에도 가끔 특강을 하시는 존경받는 어른이었다. 선생께서 인사를 받고 명함을 보시드니 관향을 물으셨고 ‘부림홍가’라고 말씀을 드리니 손을 덥석 잡으시고는 ‘선조의 스승집안에서 방문을 하시니 반가운 마음 남다르다.’고 하셨다. 수하분들에게 다과상을 특별히 보아오라시며 허백당선생이 당신의 선조이신 농암의 스승이고 퇴계선생이 농암선생에게 수학하셨음을 말씀해주셨다. 이 한마디 말씀이 조선조 성리학의 종장이라 할 수 있는 퇴계 이황선생과 우리 홍문의 선조이신 허백당 홍귀달선생의 학문적 관계를 몸으로 느끼게 한 것이었다. 이전에도 점필재 김종직선생의 종손을 만났을 때 선생의 비문을 허백당선생이 지었다는 수인사를 듣고 은근히 자부심이 생겼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이같은 일화는 선조들과 관련해서 우리 종원들이 겪었을 수 있는 많은 이야기의 하나에 불과할 것이다. 학문적으로 뛰어난 분, 벼슬이 높았던 분, 국가에 대한 충의가 뛰어난 분, 효도가 지극했던 분 등의 숱한 행장들이 여러 경로로 전설처럼 전해지면서 후손들에게 많은 자각을 주었을 것이다. 팔공산 외진 골짜기에 세거한 우리홍문은 자손들도 많지 않고 화려한 위세를 가지지도 않았지만 이렇게 한국의 명문 집안에서 알아주는 위상을 가진 사실로 인해 선조들에 대한 존경심과 함께 자존감을 갖게 했다. 중년이 되기까지 선조들의 유적과 유물, 전적들을 접하면서 왜 이전부터 어른분들이 이같은 이력을 보존하고 전하려고 노력하셨는지 이해를 할 수있게 되었다.

근래에 들어 한밤의 돌담길이 전국적인 명소로 알려지고 드러났지만 이곳을 세거지로 삼았던 부림홍문의 훌륭한 인물이나 역사는 아직 세상에 묻혀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까닭은 인구도 적지만 전국의 명문세족에 비해 드러난 인재가 많지 않고 현창된 인물들도 우리 홍문의 성격이 남에게 과시하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고려조말에 정몽주선생과 함께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키신 중시조 노(魯)자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조선조에 출사하기를 꺼렸고 조선조 중기이후에는 노론집안에 속했기 때문에 중앙관로의 진출에서 소외되었던 것이다. 이같이 조선조기간 불우한 정치적 환경으로 권문세가로 번창할 기회를 가질 수는 없었지만 훌륭한 업적으로 존경받는 인물들이 숱하게 배출되었던 사실은 알만한 문중에서는 여러 인적 관계로 이미 알려져 있다.

세보에 기록된 훌륭한 행장을 남기신 선조들 가운데 우리홍문의 이미지를 강하게 심어준 분들을 보면 우리일족이 살아오면서 지킨 가치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통계로 나타낼 수는 없으나 나라에 애국헌신한 충신열사와 학자, 효자가 가장 많은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출세와 치부 보다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인간다움을 실천하는 대의에 뜻을 두고 살아왔음을 알 수 있다. 후손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선조분들 가운데 먼저 절의지사(節義之士)부터 살펴보자. 고려조 멸망과 함께 자진한 중시조인 경재공과 함께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이 최초로 승리한 영천성 수복전투에서 선봉장에 섰던 송강공과 군수참모 역할을 했던 혼암공, 그리고 이들 의병장을 따라 항왜활동을 벌였던 당시 집안과 일가의 충의는 한없이 자랑스럽다. 그후 병자호란당시 의병에 나섰던 문곡공, 한말 의병활동에 나섰던 회계공, 일제하에서 독립운동을 하셨던 목(穆),묵(默),종락(鍾洛)등 여러 독립지사들의 경우는 부림홍문이 충의의 집안임을 역사의 흐름에서 뚜렸하게 보여주고 있다.

학문으로도 허백당께서는 조선조 초기에 이미 양관 대제학을 역임해 당대 최고 학자이면서 문인으로 이름이 높았던 서거정선생에 버금가는 문명을 떨쳤다. 특히 어부사시사를 비롯한 가사문학의 조종이면서 퇴계를 가르쳤던 농암의 스승으로 영남학맥의 큰 봉우리를 이루었고 연산군의 불의에 저항해 도끼를 가지고 상소를 올린 일과 그의 청렴하고 높은 사상과 학문은 지금도 조선의‘소크라데스’로 칭송되고 있다. 우리 일문에는 많은 학자들과 문인들이 당대에 쟁쟁한 활동으로 저술과 문집을 내는 등 문풍을 날렸지만 허백당이후 그의 5세손인 목재공은 그 중에서도 특출한 분이다. 최초의 부림홍씨세보의 서문을 쓰셨던 그는 남인 최고의 사학자로 당시 남인의 영수였던 갈암 이현일의 학문활동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이 갈암행장에도 적시되어 있다. ‘휘찬여사’, ‘동사제강’ 등 불후의 명저를 남겼지만 아직도 남인사관은 크게 빛을 보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 대쪽같은 논지는 당시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을 비판했을 때 그가 바로 관직에서 물러날 만큼 날카롭고 정의로웠지만 그후 이들의 보복으로 인해 불우한 일생을 보내게 되었다.

관직에서는 이미 시조공인 난(鸞)자 할아버지가 고려문하시중을 지내셨던 이래 중시조인 경재공, 그후 허백당, 그의 아들인 우암공, 그의 현손인 무주공, 5세손인 목재공이 현저한 지위에 올랐던 분이다. 정조연간에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통정대부 돈영부도정의 직에 올랐던 수헌공은 양산서원에 배향되었을 뿐아니라 유림들에 의해 불천위로 추대되었다. 이밖에도 벼슬을 받았던 분들은 많으나 지면상 일일이 거명하기 어렵다.

무엇 보다 우리 일문이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선조의 이력을 든다면 어버이에게 효도한 분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효자 홍도령’이야기는 홍씨문중의 대표적인 전설이라 할 정도였다. 우선 족보에 기재된 분들만 보면 여여헌 성렴, 계암공 성부, 성재공 영, 행원공 영섭, 모헌공 영수,사헌공 용부, 남암공 윤명,백원공 주영,강송공 구길 등의 효행이 남아있다. 효를 모든 행위의 근본으로 삼았던 선조들의 사상과 철학을 엿볼 수 있다.

우리 부림홍문이 세거하고 있는 곳에는 숱한 유물 유적 전적들이 남아 있는데 이들은 대부분 이상과 같은 선조들의 정신이 깃든 자취들이다.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홍문은 이같은 유적과 유물들을 소중하게 보존하고 관리해야 할 책무도 있지만 그에 못잖게 선조들이 남긴 유훈도 매우 무겁게 간직하고 실천해야 할 것이다. 특히 경재선생이 남긴 유훈과 함께 목재공께서 부림홍씨세보 초간본의 머리말에 써서 남기신 말씀은 우리 모두가 길이 마음에 담아둘 금과옥조(金科玉條)라 할 것이다.

“우리 부림홍씨는 진실로 조상을 존중할 수 있어야하며, 진실로 종족을 공경하며 남의 삶을 기뻐하고 남의 죽음을 슬퍼할 수 있어야한다. 진실로 남이 위험에 빠진 것을 보면 있는 힘을 다해 건져줄 생각을 가져야한다”

-凡我洪氏 果能尊祖而敬宗 果能喜其生而哀其死 果能見其人於顚頓危因而 思所以極濟之-

이 말씀에는 일가에 대한 깊은 철학이 베여 있으며, 이를 실천하는 것이 일족과 세상을 평화롭게 한다 는 뜻이 담겨있다.

부림홍문의 선조들이 우리일족과 더불어 사회 구성원 모두가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는 세상을 만들기를 족훈으로 남긴 사실을 살펴보면서 후손으로써 긍지와 함께 부족함에 대한 송구스러움을 느낀다.*

2.28 민주운동 기념사업회 고문 홍종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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