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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광공 홍귀달선생 학술대회



<문광공 홍귀달 선생의 사상과 문학>

학술대회 발표 논문 요약 및 관련 연구 장려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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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사말

 

역사적 인물의 사상과 업적에 관심을 가지신 연구자 여러분들께 이 글을 드립니다. 우리의 선조들 중에는 이미 많이 연구되어 잘 알려진 분들이 있는 반면 아직 제대로 연구되지 못해 잘 알려지지 않은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 분들 중에 한 분이 점필재 김종직과 동시대를 살았고 여러 가지 영역에서 교우한 허백정 홍귀달 선생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번에 <문광공 홍귀달 선생의 사상과 문학>이라는 주제로 학술대회를 하면서 느낀 바는 정말 정치가로서 문학가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그 시대를 열정적으로 살았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훌륭하신 역사 인물들을 연구하여 세상에 알리는 것은 그 자손이나 문중을 떠나 우리 모두에게 참으로 의미 있는 일임을 깨닫고 이 글을 드립니다.

 

 

● 학술대회 발표 논문 요약

 

2018년 8월 10일(금), 경북 문경 영강문화센터에서는 교수, 학예사, 향토사학자, 여러 문화원장, 문경시장 및 관계자, 시민 등 500여 명이 모여 <문광공 홍귀달 선생의 사상과 문학>이라는 주제로 조선 전기 문제적 인물인 허백정(시호 문광공) 홍귀달 선생의 생애(1438~1504), 사상, 문학, 업적 등을 다룬 제19회 경북역사인물학술발표대회(경북문화원연합회 주최)가 성황리에 열렸다. 여기서는 문광공 홍귀달의 ‘역사적 삶과 시대정신’(정출헌 부산대 교수), ‘한시 세계’(박종순 공주대 교수), ‘관인으로서 정치적 실천의 특징’(이명희 공주대 교수) 등 총3편의 논문이 발표되었으며, 뒤이어 질의응답과 열띤 토론이 있었다.

 

부산대 점필재연구소를 창설한 정출헌 교수(한문학과)는 조선왕조실록과 그의 남겨진 글과 시 등을 통해, 그가 경상도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나 성종을 도와 조선전기 태평성대를 완성하고, 뒤이어 성종의 유훈을 받들어 연산의 폭정을 바로잡기 위해 고군분투한 모습을 그려내었다. 그의 출생지에 세워진 오봉서원(개칭 임호서원)에는 그의 삶은 “화려한 문장이요, 독실한 덕행이다. 인을 이루고 의를 취하여 신하의 자세를 면려하였다.”라는 문구로 집약되어 잘 나타난다고 하였다. 또한 후세에 우복 정경세가 홍귀달을 총평한 “성종의 명재상이 되기는 쉽지만 폐주 연산군의 직신(直臣)이 되기는 어렵고(爲成廟之名卿易 爲廢主之直臣難), 아름답게 꾸미는 문장을 쓰기는 쉽지만 솔직하고 진실한 간언을 하기는 어렵다.”는 글귀로 결론을 대신하였다. 정 교수는 홍귀달 선생이 무오사화 이후 홀로 남아 유교정치, 도학정치를 되살리고자 노력한 바를 강조하였으며, 중앙의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지우인 점필재 김종직을 외직에서 중앙직으로 끌어주기 위해 노력한 점, 세조 때 비슷하게 출사했지만 점필재와 달리 세조를 칭송하는 글을 쓰지 않은 점, 성종조에 훈구대신들(특히 서거정)과 조화를 이루었지만 그들과 교유한 글월이 없다는 점, 그의 평생 멘토인 서거정에게 주는 헌사도 없었다는 점 등에 비추어볼 때, 그가 사림 중의 참 사림이라고 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후세가 그를 더 연구할수록 ‘김종직의 친구 홍귀달이 아니라 홍귀달의 친구 김종직’이라고 해야 할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홍귀달은 태평성대에 훈구로 살다가 위기의 시대에 사림으로 남는 삶을 살았으나, 당시 점필재, 매계 조위, 용재 성현 등과 4군자라고 일컬어졌지만, 우리 역사에는 잊혀진 인물이 되어왔지만, 향후 점차 그 뜻과 업적을 되살려낼 만한 위대한 선비라고 평하였다.

 

박종순 교수는 허백정이 갑자사화로 피화를 겪은 후 많은 글월이 멸실되었음에도 그의 문집(부산대점필재연구소 간, 허백정집 1~4집)에 실려 있는 한시 작품은 866제 1,123수인데, 이는 그를 천생 시인으로 인정하기에 충분한 자료가 된다고 하였다. 허백정은 일상의 모든 상황을 시로 지어 자신의 정회(情懷)를 드러냈던 천생의 시인이었으며, 그에게 있어서 시는 평생의 동반자였고, 자신의 속내를 숨김없이 고백할 수 있었던 소중한 친구였다고 평하였다. 허백정의 한시는 크게 전형적인 유학자로서 경세(經世)의 의지와 왕화(王化)를 송찬(頌讚)한 시, 사행(使行)의 서정을 피력한 시, 귀양객의 괴로운 심사를 표출한 시, 가족 간의 사랑과 교유의 감정을 노래한 시, 진실한 삶의 고백과 달관을 읊은 시 등 모두 6개의 영역으로 분류할 수 있다. 박 교수는 허백정 한시문학의 중핵(中核)이라고 판단되는 ‘경세의 의지와 허백의 형상화’의 관점에서 허백정 한시를 소개하였다. 특히 고려 때와 달리 한글이 반포된 이후 조선전기에 우리나라 한시의 정형을 찾고자 그가 노력하였으며 일정한 성취를 이루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5세에 한시를 짓기 시작하였고, 10세에 은쟁반에 옥구슬 구르듯 논어를 외웠으며, 사가독서를 하고, 명나라 사신을 접대할 때 서거정이 막힌 64자 운(韻)에 답한 일화(39세), 성종 때에는 전문후무하게 투표를 통해 대소신료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10년간 문형(文衡)을 지냈으며, 거의 모든 시를 질이 낮다고 욕하던 김시습이 삼일포에 걸린 홍귀달의 시를 보고 시답다고 칭송한 일 등이 거론되었다. 박 교수는 허백정은 15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중요한 시인으로서의 위상(位相)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는 천생의 시인으로서 삶의 여러 우여곡절을 곡진하면서도 세련되게 묘사하여 한시로 형상화한 탁월한 작가였다고 평하였다.

 

조선시대 관료들의 평균 수명은 50년 남짓하였다. 67세의 생에서 무려 44년간 중앙 관인으로 활동한 홍귀달의 정치적 삶을 살펴본 이명희 교수는 그가 훈구에서 볼 때는 사림, 사림에서 볼 때는 훈구여서 저평가되는 운명을 맞았다고 하였다. 그는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바를 기초로 홍귀달 선생이 성종조 태평성대, 조선전기 유교적 국가 틀을 놓은 선비 중의 중요 인물임을 말하였다. 특히 학자이자 관료로서 홍문관, 예문관, 성균관에서 책임있는 활약상을 입체적으로 조명하였다. 성균관대사성을 지낼 때 구름같이 몰려든 젊은 인재들에게 우리 함께 요순시대를 열자고 격려하며 수많은 선비를 책임지고 길러낸 점도 지적하였다. 연산군 때 무오사화 이후 3사가 취약해질 대로 취약한 가운데 이를 복구하고자 그가 몸소 간언과 상소를 그치지 않은 것은 선비정신의 기백과 전범으로 칭송될 수 있다. 그는 관료로서 사림으로서는 판단하기 어려운 윤씨 폐비 문제에서 성종의 뜻과 달리 원자의 장래와 그것이 가져올 후과를 고려하여, 윤씨 문제를 시기질투는 여성의 자연스런 성정으로 여겨줄 것을 강조하여 사림식 판단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상소를 했다고 하여 성종으로부터 처벌을 받은 적도 있다. 사림식의 판단으로 무오사화는 그가 예고된 대로 귀결되었다. 연산의 선생이었기에 그는 무오사화를 견뎌낼 수 있었지만, 그 후 홀로 남아 조선의 정치가 유교정치, 도학정치의 건국이념에서 멀어져 간 것을 돌이키고자 그는 고군분투하였다. 끝없는 상소와 간언, 장녹수 일당의 부당한 인사 청탁의 거절, 손녀를 후궁으로 들여 인척관계를 맺자는 연산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한 점 등은 그가 갑자사화에서 피화를 면치 못할 일이 되었다. 이 교수는 막스 베버(Max Weber)의 정치인과 관료들의 책임윤리와 신념윤리를 빗대어 홍귀달 선생은 성종대에는 정상적 유교정치, 도학정치가 이루어졌으므로 책임윤리에 따라 최선을 다하였으나, 조선의 건국이념, 국가가치가 무너진 연산조에서는 신념윤리의 위기와 결기의 삶을 살았다고 평하였다. 다만 그는 사림 측으로부터 선후배와 제자들의 무고한 생명을 앗아간 무오사화를 막지 못하고 홀로 살아남아서 고봉 기대승이 수립한 사림의 종통에서 제외되는 불명예를 안았다고 보았다. 그렇지만 연산의 정치에 대해 결연히 ‘당신의 정치는 조선의 건국이념, 국가가치로서 유교정치, 도학정치를 파괴하는 패륜’임을 끊임없는 상소를 통해 그 폐단을 만천하에 드러내었다. 그는 자기의 생명과 집안의 멸문지화(네 아들 모두 유배를 당하고 아내가 심병을 얻어 죽음)를 돌보지 않고, 조선의 유교정치를 복원하는 제단에 산화하였다. 그가 뿌린 피는 중종반정을 이끌어내었고 조선건국을 반대한 세력인 사림들이 대거 도학정치를 시작하는 발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태평성대의 정치에서는 책임윤리가적인 실천을 일관하다가 국가가치가 파괴되어가는 시절에는 신념윤리가적인 삶으로 마감하였으나, 사림으로부터는 훈구로, 훈구로부터는 사림으로 평가받는 비운으로 점차 잊히는 인물이 되었다고 안타까워하였다.

 

이날 발표 이후 질의응답에서 허백정 홍귀달은 4군자(김종직, 홍귀달, 조위, 성현) 중 한 사람이었으나 유독 그만 역사에서 왜 잊히게 되었는가? 홍귀달과 같이 사림으로부터 훈구로, 훈구로부터 사림으로 평가받는 다른 역사적 인물도 있는가? 사림이나 훈구의 구분이 불분명하였던 시대를 산 홍귀달을 후세가 사림의 세계관으로 평가함(고봉 기대승의 사림 종통 정립)으로써 그는 더 평가절하된 것은 아닌가? 건국이념, 국가가치가 파괴되어가는 오늘날 홍귀달의 삶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등의 질의에 문광공 홍귀달은 숱한 논란과 의문을 남긴 문제적 인물이 되었다.

 

 

● 연구 장려 안내

 

여러 연구자분들께서는 허백정 홍귀달, 목재공 홍여하(휘찬여사, 동사제강 등 상고사에서 고려말까지 역사서 찬술, 대학 등의 독특한 주석과 이기론 관련 철학서를 남김), 우암공 홍언충(무후하여 풍양 조씨, 경주 이씨 등이 문경시 영순면에 있는 청산재를 통해 지난 500년간 외손봉사를 이어오고 있음), 눌암공 홍언국(진사시에 장원급제 했으나 갑자사화로 더 이상 출사하지 않음), 무주공 홍호, 선천공 홍인걸(무과 급제), 동암공 홍대구(역경을 1만 번 읽고 주석을 함, 허백정의 연보 작성) 등 허백정과 그 자손의 인물과 업적 연구에 많은 관심을 가져주시기 바랍니다. 

부림홍씨 문광공(허백정 홍귀달)파 문중에서는 위의 선조들에 대한 연구를 하고자 하시는 분들께 연구에 필요한 자료들을 적극 제공해드리고자 합니다. 즉 연구 발표된 논문이나 자료집 그리고 영인본이나 기타 연구에 필요한 자료들을 제공하고자 하오니 필요하신 분들은 아래의 연락처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홍재휴, 홍종관, 홍후조 교수 일동 삼가 알려드림

 

 

● 문헌 자료 요청 및 연구 성과 알림 연락처

 

홍재휴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허백정 18세손, 053-753-4551)

홍종관 대구교대 교수(허백정 14세손, 010-2532-8766, jkhong@dnue.ac.kr)

홍용락 동아방송대 교수(허백정 16세손, 010-3714-5485, hyrack@hanmail.net)

홍상욱 영남대 교수(허백정 19세손, 010-9812-2863, sanguk@yu.ac.kr)

홍후조 고려대 교수(허백정 18세손, 010-9060-5397, educu@kore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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